제목을 써 놓고 보니 아무래도 독자님들에게 꾸중을 들을 것 같다. 무슨 글 제목이 간첩 난수표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같으냐는 책망 말이다. 그렇다. 일종의 방언이고 난수표다. 뜻을 모르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고 그 속뜻을 알면 신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난수표다.

고대 중국에 ‘제’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경공이라는 사람이 공자께 찾아와서 정치의 도리를 물었다.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할 수 있겠습니까? 한 수 지도하여 주십시오.”

공자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씀했다. ‘군군신신 부부자자’ (君君臣臣 父父子子). 매우 간결한 대답이다. 그것도 방언처럼 들리지만 그 뜻은 매우 웅대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애비는 애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우면 되느니라.”

이 말을 듣고 경공은 크게 깨달았다. 정치의 정도를 찾아내는 만통열쇠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를 경영하는 일에도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려면 ‘목목장장 권권집집’이라야 한다. 목사는 목사의 본분, 장로는 장로의 도리, 권사는 권사의 사명, 집사는 집사의 직분에 “죽도록 충성”해야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아닌가(행 9:31).

그래서 교회 임직식에서 설교나 격려사를 맡으면 자주 이 교훈을 인용해 왔다. “도대체 권사 직분을 받고도 집사때와 똑같다면 무엇 때문에 권사가 되셨나요?” 주님으로부터 그런 호통과 꾸중을 들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어떻거나 유교의 가르침도 성경의 진리를 풀어내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 그런 점에서는 다른 종교의 경전들이나 심지어 사탄의 언행들도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양약이 되기도 한다. 특히, “하늘에 죄를 지으면 향하여 기도할 곳이 없다”며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공자님의 교훈은 주목할 대목이 여럿이다.

그런데 공자보다도 훨씬 전에 하나님은 그런 교훈을 요담을 통하여 그 자녀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기드온 사사의 아들 아비멜렉이 다른 형제 70명을 학살한 일이 있었다.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려는 폭력 혁명이었다. 그런데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이 용케 피해서 도망을 갔다. 그리심 산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한 가지 비유를 말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나무들이 모여 왕을 뽑았다. 그래서 감람나무더러 왕이 되라고 첫 번으로 추천했더니...” 그런 비유였다(사 9장). 감람나무는 단번에 거절했다. 무화과나무도, 포도나무도 연이어 감람나무를 따라서 왕에 추대된 것을 곧바로 사양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감감 무무 포포’였다. 올리브, 무화과, 포도 같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겠다는 결단이었다. 하늘이 주신 소명에만 자신의 생명을 불태우겠다는 뜻 아닌가.

오직 가시나무만이 제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왕으로 나섰다. 꽃에서 나오는 좋은 향기와 꿀을 생산하고 그 가시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를 보호해야 할 사명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오히려 맹종하지 않으면 그들을 불태워 죽이겠다는 협박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 가시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아비멜렉이었다.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두개골이 쪼개져 죽은 사람이었다. ‘가가’를 버린 것이 바로 참극의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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