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돌아보면서 한 사람의 이민자로서 상당히 충격이 되었던 사건은 미국 정부가 예산문제로 단기간 폐쇄된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처하던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코스타리카 선교지를 방문했을 때 한 선교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중남미국가 사람들에게 미국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며, 오히려 자본으로 공략해 들어오고 있는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뉴스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많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장기적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세계 정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세계 정세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불안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세계 정세 때문인지, 사람들은 안정된 미래와 노후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더욱 애를 쓰고 있으며, 경제 문제가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할 일이겠지요. 하지만 염려되는 것은 사람들이 개인의 안정된 미래에 관심을 갖다 보니까, 공공의 선이라든지 도덕적인 가치에 관한 관심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에 대한 집중 현상은 정당한 분배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사회정의를 약화시켜가고 있지만 성공의 미학으로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한 개인이 땀흘려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 대가로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분명히 바람직한 일이고 존중받을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치 있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다시 투자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안정된 삶을 위해서만 사용되고 만다면 그리 의미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게 그렇습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때는 쉬이 악해지기 쉽고, 허무해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은 나눔으로써만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것을 나누어 줘 본 사람들은 압니다. 그것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이고, 살 맛 나는 일인가를 말입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곧 행복하게 사는 길이요 사람답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들도 성공의 미학을 넘어서서 나눔의 미학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부르심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 보편적인 구원의 부름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처럼 예수 믿고 영혼이 복을 받고,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내 삶의 중심의 보좌를 예수께 내어드리면 우리 안에 치유가 일어나고, 삶의 기쁨이 회복되고,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우리가 입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해 보고, 예수를 영접해 보면 영적인 감동과 구원의 확신이 찾아옵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예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름은 헌신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사역을 위한 부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요즘 흔히 말하는 제자로의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보편적인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보다는 헌신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더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모세를 비롯해서 여호수아와 사사들을 비롯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은 헌신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사역을 함께 할 제자들을 불렀고, 제자들은 이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제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은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언제나 저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단순한 추종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처럼 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스승과 제자는 오늘날의 스승과 제자와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고 전달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 함께 하면서 삶으로, 몸으로 스승의 지식을 체득하는 것이고 스승과 동일한 삶의 방식을 물려받는 것이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스승의 권위까지 물려받고, 스승이 하는 일을 계승하는 것이 제자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고, 복을 받는 신앙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예수님처럼 사는 제자말입니다. 제 자신에게 다시 질문해 봅니다. ‘나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인가?’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의 생애를 묵상하는 가운데 누가복음 4장 18-19절 말씀에서 제자의 길을 발견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에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제시해 주는 비전 선언문과 같은 말씀이었으며, 공관복음서를 살펴 보면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위에 언급된 구절에서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의 희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빚을 탕감해 주고, 돈 때문에 종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해를 의미합니다. 사회적인 약자를 다시 회복시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해 보면,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왜곡된 사회적인 정의와 평화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6년부터 기독교 단체들과 NGO 단체들을 중심으로 쥬빌리 2000이라는 희년 운동을 벌여서 제3세계에 대한 부채 탕감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상징적이지만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께서 하신 일은 한 사람을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그 안에 자유와 해방이 있고, 치유와 회복이 있고, 사람답게 사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학적으로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어둡습니다. 오래 사는 데는 성공했는데,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는 데 실패했습니다. 절대진리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절대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공동의 선과 도덕적인 가치가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빛이 되어 세상을 인도해야 합니다.
다가오는 새해에 우리 주변의 상황은 그렇게 희망차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시간이기에 좋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소망을 꿈꾸지 못하면 그야말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에 관한 꿈을 다시 꾸어야 합니다. 밝아오는 2014년에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하게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꿈들로 새로워질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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