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짜리 꼬맹이한테 엄마는 묻는다. “나를 얼마나 사랑해?” 얼굴 가득 웃음 담은 꼬맹이는 “많이” 라고 말한다. 성이 차지 않는 엄마는 “얼마나?”라고 묻는다. 양손을 활짝 벌린 아이는 “이만큼” 이라고 대답한다. 엄마는 다시 묻는다. “얼마큼?” 가슴을 내민 아기의 손이 뒤로 맞잡혀진다. 엄마가 부러 다시 묻는다. 아이는 크게 대답한다. “하늘 만큼! 땅 만큼!” 드디어 엄만 아이를 품에 안는다. 자주 보는 사랑 확인하기이다.

종이 상자에 가득 담긴 도토리들을 바라보며 사랑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사랑의 힘은 대단했다. 흔하디 흔한 도토리들조차 큰 행복을 만들어 내는 능력. 그러니까 내가 당뇨병을 가진 지가 벌써 11년이 넘었다. 그동안 약을 더 강하게 먹기도 하고, 약하게 먹기도 했지만 6개월마다 만나는 의사로부터 그런 대로 잘 조절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 9월 정기 건강진단을 받으로 간 나는 의사로부터 큰 책망을 받고 말았다. 6개월 동안 핏속의 당분 상태를 말해주는 헤모글로빈 A1C, 권장 수치가 5.5-7.5인데 8.2가 되었다며 당장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으려면 보험에서도 처리를 해주지 않는 비싸고 가장 강한 약으로 바꾸라며 처방전을 써주려 하는 것이었다.

한 번 인슐린 주사를 맞기 시작하면 평생으로 이어져야 하고 요즘 형편은 한 푼의 지출이라도 막아야 할 판이라 비싼 약은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의사에게 통사정을 했다. "다시 열심히 식이요법이나 운동을 해볼 테니 그 처방을 3개월 후로 미루어 달라. 그때는 하라는 대로 할 테니 평생 후회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숫제 생떼를 썼다.

잠시 생각하던 의사는 3개월 후라고 단단히 못을 박고 유예기간을 허락해 주었다. 난 자신이 있었다. 맨 처음 당뇨 진단을 받았을 땐 헤모글로빈 A1C가 10이 넘었지만 극성스럽게 음식조절과 운동을 겸해서 바로 잡지 않았던가. 그렇게 잘 조절했는데 올여름엔 과일도 먹고 싶은 만큼 먹었고 음식 또한 그랬다. 마음이 끝없이 풀어져서 당뇨 환자인 것을 잊었나보다. 그러나 이젠 다시 결심을 단단히 하고 절제를 해야 했다.

음식 절제가 제일 어려웠다. 먹기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나로선 혼자 먹을 때는 그런 대로 괜찮지만 대부분의 식사가 혼자가 아니기에 권하는 것을 거절하기가 힘들다는 핑계로 맛있는 것을 절제하지 못했다. 거절 못하는 나약한 성격인지라 권하지 말라고 당 조절이 안 되고 위험 수치에 있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했다.

내가 속한 소그룹의 한 집사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김으로 보나 힘쓰는 것으로 보나 병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하며 당장 자기 뒤뜰에서 야채를 한 소쿠리 뜯어 왔다. 토마토, 호박, 가지, 상추 등이 아마추어 솜씨가 아니었다.  생긴 것이 먼지 하나라도 탈탈 털어낼 듯 깔끔한 차림새에 날씬하기는 누구에 지지 않고, 예쁘고 흠잡을 곳이 하나 없는, 완전 세련된 그 집사님은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 땅만 밟다가 미국에 왔다는데 어찌 노련한 농부같이 튼실한 야채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받은 야채를 하나 하나 들어다보며 내가 그리 좋을까. 아이 앞의 엄마처럼 혼자 물어 봤다. ‘얼마큼?’ 혼자 대답했다. ‘집안 만큼 뒤뜰 만큼.’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도토리가 가득 들어 있는 상자를 건네 주었다. 혈당을 내리는 데 좋은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멋쟁이가 온 동네 돌아다니면서 주워 모았다고 했다. 도토리 하나 하나는 그분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사랑이었다. 내가 이런 사랑 받아도 되는 걸까. 난 얼른 카드 하나를 꺼내어 보내 준 사랑에 답을 적고 있었다.

‘우리가 올해 집사님 댁의 뒤뜰에서 나오는 것 모두 다 맛보았습니다. 이번엔 온 동네 도토리까지 주워 보냈군요. 나를 향한 집사님 사랑이 두 손 크게 벌려 ‘이만큼’ 보다 큰 뒤뜰 만큼도 부족하여 ‘동네 만큼’이 되었네요. 내가 더 좋아지면 아마 ‘하늘 만큼 땅 만큼’이 되겠지요. 그건 하지 마세요. 별 따러 가야잖아요. 왜 그 예쁜 마음 자꾸 주어서 이 거친 마음 빼앗아 가냐고요. 근데 빼앗기면서도 내 마음에 생기는 이 뿌듯함, 그래요. 행복과 기쁨이 피어나고 있어요. 바로 집사님의 그 예쁜 마음의 씨가 여기에 떨어져 싹이 나오고 있어요.’

긴 여름 햇볕에 활짝 말라 건조한 내 마음이 빼앗긴 그 자리엔 예쁘고 고운 마음 하나 들어와 싹이 나고 어느덧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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