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온 지 12년이 되어가니 서울에 홀로 계신 엄마와 헤어진 지도 딱 그만큼의 세월이다. 아니 결혼하고서 이미 일상의 거리가 멀어졌으니, 그 세월까지 보태면 엄마와 함께 한 시간이 결혼 이후의 시간보다 더 짧아 보인다.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서울로 전화를 건다. 몇 번 한국을 방문한 기간을 제외하곤 한 주도 걸러본 적이 없다. 지난 주말에도 전화를 했다. 날이 갈수록 기운이 없고, 기운이 없어서 다 포기한 듯 맑아진 엄마의 음성이 슬펐다. 이민도 마다한 채 쇠약해진 몸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엄마와 통화를 할 때마다 철이 조금씩 든다. 무조건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가슴 속에서 슬픔의 강물이 범람해 어쩔 줄 모르는 그때, 막내가 만화영화 한 편을 틀어 주었다. 제목이 “UP"이라 했다. Pixar가 2009년에 제작해 대박난 3D 장편 만화영화라고 했다.

주인공 ‘칼 프레드릭센’은 수줍고 말없는 소년이다. 하지만 소년의 우상은 당대에 잘 나가던 탐험가 ‘찰스 먼츠’이다. 어느날 칼은 ‘엘리’라는 말광량이 소녀와 친구가 된다. 그녀의 꿈도 탐험이고 우상도 똑같이 찰스 먼츠이다. 영화 속 흑백 TV를 통해 인기를 누리던 탐험가 찰스 먼츠가 소개된다. 남미의 파라다이스 폭포 부근에서 발견했다면서 커다란 새의 뼈들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학자들이 가짜라고 믿어 주질 않는다. 화가 난 찰스 먼츠는 그 새를 생포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면서 비행선을 타고 남미로 가버린다.

 
만화의 전반부에는 칼과 엘리의 우정이 애정이 되고, 다시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 해로하다가 엘리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칼 혼자 쓸쓸히 남게 되기까지의 인생 여정이 앨범 넘기듯이 짤막짤막하게, 너무나 예쁘게 소개된다. 하늘의 작은 구름들이 부부의 눈에 모두 태아들로 보이는 장면. 벽에 아기를 위한 그림을 그리고 유아용품들을 장만하는 장면, 그러나 아기를 가질 수 없게 된 부부가 슬퍼하다가, 찰스 먼츠가 가르쳐 준 파라다이스 폭포의 그림을 그리며 어린 날의 꿈을 되살리기로 약속하고 유리병에 돈을 모으는 장면,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나고 폭풍에 나무가 쓰러져 집이 망가져, 수리 비용을 위해 번번이 유리병을 깨뜨리는 장면이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코끝이 찡해진다.

 
이제 78살이 된 칼은 혼자 빈집을 지키고 있다, 부부의 추억이 가득한 작은 집은 대규모 개발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개발회사는 집값을 후하게 쳐줄 테니 팔라고 하지만, 칼은 부부가 함께 일군 집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버틴다. 어느 날 개발회사의 차량이 우편함을 망가뜨리자 화가 난 칼이 지팡이로 냅다 일꾼의 이마를 때리는데, 아뿔사 피가 나는 것이다. 개발업자는 이를 기회로 삼아 당황한 칼을 법정으로 불러내고, 요양원으로 가라는 판결을 받게 만든다.

드디어 요양원 직원들이 칼을 데리러 온 그 순간, 집의 지붕을 감싸고 있던 검은 천이 벗겨지면서 오색 풍선 수천 개가 하늘로 떠오른다. 풍선들을 매단 집이 떠오른다. 엘리와의 약속을 칼이 실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날아가는 집 안에서 방향키를 조종하며 칼은 파라다이스 폭포로의 탐험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집이 날아오르는 바람에 베란다에 서있던 이웃집 꼬마아이 러셀도 졸지에 여행의 동반자가 된다. 8살짜리 꼬마는 노인 돕기 봉사를 해서 유소년 탐험대의 배지 하나를 타려다가 진짜 모험을 하게 된 것이다.

도시 위를 날아가다가 폭풍에 휘말려 방향을 잃었나 싶더니, 어느새 남미의 파라다이스 폭포에 도착한다. 칼과 러셀을 처음 반겨준 이는 화려한 빛깔의 깃털을 가진 덩치 큰 새이다. 러셀은 즉시 새에게 ‘캐빈’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자신을 ‘더그’라 소개하는, 말하는 개도 만난다. 그리고 어린 날의 우상이었던 찰스 먼츠까지 만난다. 나이도 잊고 가슴이 잔뜩 부푼 칼은 먼츠의 초대에 기쁘게 응한다.

 
하지만 얼마 안가 찰스 먼츠가 생포하려던 새가 캐빈이며, 늙은 탐험가는 희귀새를 생포하겠다는 욕심만 가득할 뿐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칼은 눈치챈다. 우여곡절, 좌충우돌의 소동에 휘말리게 된 칼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 이게 아닌데... 이럴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닌데... 칼은 부인과 나란히 앉곤 했던 의자에 피곤한 몸을 붙이고 부인 앨리가 어릴 적에 만든 모험 책을 넘기며 추억에 잠긴다. 그런데 모험 사진과 글로 메우겠다고 했던 책의 여백에서 지난날에 찍었던 부부 사진들을 발견한다. 끝장에는 엘리의 마지막 인사가 적혀 있다. ‘당신과의 모험이 정말 즐거웠어요. 이제 새로운 모험을 떠나요.’

칼은 엘리의 유언대로 새로운 모험을 떠나기로 한다. 숫자가 줄어든 풍선들이 집을 버틸 수 있도록 평생 간직해온 가재도구들을 몽땅 내버리고, 희귀새 캐빈과 별난 개 더그와 어린 소년 러셀을 구하러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다. 찰스 먼츠와 기계적으로 조련당하는 개 일당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집도 날려 보내게 된다. 안타까워하는 러셀에게 칼이 말한다. “집은 그냥 집일 뿐이야.”

희귀새를 새끼들이 있는 보금자리로 보내 주고, 칼과 러셀과 더그와 개 일당은 먼츠의 비행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날아간 집은 파라다이스 폭포 옆에 내려앉아 있다. 이후 얼치기 탐험가들은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고, 따스한 이웃으로 돌보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뒷이야기들을 만화의 마지막 스틸 사진(만화?)들이 보여 준다.

주름지고 완고하게만 보이는 노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던 모험의 꿈!! 가족과 이웃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러나 핵가족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미국에서 기운 빠져 홀로 살기 어려운 노인이 된다는 것은 그 모두를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자 노인은 주택을 떠나 실버 타운으로 가고, 가난한 노인은 노인 아파트에서 연명하다가 요양원으로 간다. 그곳이 누추하건 화려하건, 쾌적하건 불편하건, 노인들의 시선은 늘 밖을 향하고 있다. 자식들이 사는 세상, 어지럽지만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낸 세상을 향하고 있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그리움은 커져만 간다.

칼은 양로원 대신에 만화가 펼쳐준 공상의 세계로 피터 팬처럼 날아오른다, UP!! 외로운 노인 칼과 부모가 살갑게 대해 주지 않아서 외로운 꼬마 러셀은 소통의 문이 닫혀 있는 땅이 아닌 하늘에서 서로에게 의지한다. UP!! 노인과 아이는 야생의 커다란 새 케빈과 과학적인 발명품 덕분에 말을 하게 되었지만 탐욕스러운 찰스 먼츠의 부하이기보다 칼의 가족이 되고 싶은 개 더그 덕분에 살맛이 난다. UP!! 예기치 않은 모험 덕분에 소통과 사랑을 만끽하게 된다. UP!! 일상의 더께로 내려앉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 회한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인연들끼리 외로움을 채워 주고, 아픈 곳을 싸매 주고, 늘 함께한다는 이야기다. UP!!

엄마와 내게도 ‘UP'을 가능케 하는 날아다니는 집의 판타지가 필요한 거 아닐까? 나는 무엇을 타고 날아올라 엄마에게로 갈 수 있으며, 엄마와 함께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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