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공동체를 위한 상호존중의 대화(56)

신앙의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기 위해서는

“신부님, 순종하면 순종의 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최근에 수녀님 한 분이 저에게 들려 주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한국 천주교회의 수도회 중 하나인 “거룩한 말씀의 회”소속 수녀로서 수도 생활을 30년 넘게 하신 분입니다. 15년 전, 미국 시카고에서 신학 공부를 하실 때부터 알고 지낸 수녀님입니다. 그분이 올해 시카고를 다시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호에 살펴보았듯이 수도회에서는 순명(순종)을 서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이며, 그 서약의 구체적 실천 중의 하나가 수도원장에 대해, 그리고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수녀님, 정말 절대 순종합니까? 명령이 옳지 않아도 순종합니까?”수녀님께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수도원장이 불에 타서 숯이 된 나뭇가지를‘밭에다 심어라. 그리고 매일 물을 주어라’라고 명령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성적으로는 숯덩어리를 밭에다 심고 물을 준다고 새싹이 나겠는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짓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비록 순종을 서약했지만, 수도원장의 명령이라고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가?’하고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도회에서는 수도원장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숯덩어리에서 새싹이 나오지 않을지라도, 대신에 순종의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수녀님의 대답에 정말 놀랐습니다. 순종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수도원장의 명령이 옳지 않다는 생각은 나의 이성과 경험에서 비롯된 판단입니다. 수도원장의 명령이 비합리적, 비효율적, 비생산적, 비이성적이고 또 미숙하다고 판단되더라도 ‘순명’해야 합니다. 판단은 나의 기준에 의한 나의 판단이기에, 신앙적‘양심’에 비추어 절대적인 ‘악’만 아니라면,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수도회의 공동 규칙이며, 실천이고, 전통입니다.

교회 전통에서 순종의 서약

전통적인 교회에서 성직자가 될 때에 순종을 서약합니다. 성공회의 성직서품(안수식)에서 순종서약을 하며 서약서에 서명합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순종서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네 주교와 교회의 법규를 따라 다른 성직자들을 공경하여 순종하고, 저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도함을 기쁜 마음과 뜻으로 좆아 행하겠습니까?” 주교와 다른 성직자들을 공경하며 순종하는 것을 서약하고 실천하는 성직자의 길을 성공회는 종교개혁 때부터 지켜 오고 있습니다. 이는 수도원에서 장상과 형제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성직서품, 또는 수도 서약을 하는 이들이 순명(순종)을 서약합니다. 수품자(성직 안수를 받는 자)들은 주교의 두 손 안에 자기의 두 손을 합장하여 넣고, 주교와 그 후임자들에 대한 존경과 순명을 서약합니다. [직권자인 주교가 교구 수품자에게] “그대는 나와 나의 후임자에게 존경과 순명을 서약합니까?” [수도회 수품자에게] “그대는 그대의 교구 주교와 소속 장상에게 존경과 순명을 서약합니까?”그러면 수품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예, 서약합니다.”

동방 정교회 신앙에서 영적 아버지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곧 영적 아버지인 신부(神父)는 신자들의 신앙 생활뿐만 아니라 세속적 삶까지 지도해 주는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경험이 많은 영적인 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낙원의 상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인간의 자유의지를 영적인 아버지께 순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제자는 “무조건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순종의 자세를 견지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제자가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아버지가 제자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순종과 겸손의 실천을 통하여 은총을 경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순종 명령과 그 실천

성 프란치스코의 『잔 꽃 송이(제30장)』에는 순종의 명령과 그 실천에 대한 아름답고 감동적인 실화가 담겨 있습니다.

어느날 성 프란치스코는 루피노 형제에게 아시시로 가서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시는 대로 사람들에게 설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루피노 형제는 “존경하는 사부님! 제발 저를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아시다시피 설교의 은총도 없고 우둔하고 무식한 사람입니다”라고 간청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가 내 말을 듣지 않으므로 거룩한 순종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팬티 하나만 입고 아시시의 성당 안에 들어가 벌거벗은 채 설교하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이 명령을 따라 루피노 형제는 옷을 벗고 아시시로 가서 어떤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설교대로 올라가 강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저것 좀 봐! 저 사람은 너무 고행을 했기 때문에 머리가 돌았어”하고 소란스럽게 웃고 떠들어댔습니다.

한편 성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 중의 하나인 루피노 형제가 즉시 복종하는 것을 보며, 너무 가혹한 명령을 내렸다고 스스로를 꾸짖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하나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명령한 것을 너도 실행하라.”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 역시 옷을 벗은 채 레오에게 자기 옷과 루피노의 옷을 들리고는 벌거숭이로 아시시에 들어갔습니다. 아시시의 사람들은 성 프란치스코도 루피노 형제와 마찬가지로 고행이 지나쳐서 미친 줄 알고 놀려댔습니다.

루피노의 설교가 끝나자 성 프란치스코는 알몸뚱이로 설교대에 올라가서 세상을 가벼이 여길 것과 거룩한 극기와 자발적인 가난, 그리고 천국을 열망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당하시고 악마에게 포악하게 옷을 벗기우신 일과 능욕으로 매질 당하신 일을 훌륭하게 설교하였더니, 거기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열심과 통회의 정이 치밀어 올라 소리내어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날 아시시의 온 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슬퍼하는 소리로 덮였는데 이렇게 슬피 운 일은 과거에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성 프란치스코와 루피노 형제의 행동에 큰 감화와 위안을 받았던 것입니다.

순종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교회와 수도회 전통에서 순종 서약은 순종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빌 2:8).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그 순종의 영적 질서를 통하여 교회는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먼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런 다음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영적 질서를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내맡기는 사람입니다.

수도자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며, 순종 서원을 드립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서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파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매일 아침 세 가지 서원을 반복해 다짐합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성직자들은 일 년에 한 번, 특히 성 목요일에 함께 모여 성직서원을 갱신하면서 순종서약도 갱신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일회적인 일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하여 지속되고 반복되는 훈련입니다. 순종은 수도자 그리고 성직자들에게만 요구되는 신앙의 덕목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덕목입니다. 순종은 성장하고 성숙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속적인 예배이고 훈련입니다.

“이번에는 젊은이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원로들에게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섬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스스로 낮추어 하나님의 권능에 복종하십시오.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베드로전서 5:5-6, 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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