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한 지가 언제인데 지난 주말에야 막내는 ‘인사이드 아웃’ 애니메이션 영화를 TV로 구경시켜 주었다. 오래 기다린 보람을 느낄 만큼 좋았다. 한편 어린아이보다는 어른들이 더 좋아할 만한 만화라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인간의 내면 세계를 다채로운 입체 애니메이션으로 구경한 셈인데, 월요일에 출근해서도 은근 화가 치밀면 버럭(Anger) 캐릭터가 떠오르고 기분이 가라앉으면 슬픔(Sadness) 캐릭터가 떠올라 혼자 빙긋이 웃었다.

영화가 개봉된 뒤 인터넷과 신문을 통해 기쁨, 슬픔, 소심, 버럭, 까칠이라는 재미있는 한글 이름들을 이미 익혔다. 주인공 라일리 내면의 슬픔과 기쁨이 뜻밖의 사고로 감정 조절 본부에서 일탈하는 바람에 벌어지는 소동과 귀환의 이야기라고, 기쁨만으로는 세상을 살 수 없으며 슬픔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깨닫게 해주는 만화영화라는 기사만 몇 번이고 읽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같은 내용이라도 달리 설명하고 싶어진다. 열한 살, 세상이 온통 기쁨으로 충만한 줄 알고, 그러기만 바라던 소녀에게 갑자기 변화가 찾아온다. 미네소타의 탁 트인 들과 눈과 빙판을 떠나 샌프란시스코 뒷골목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온다. 이삿짐 트럭이 도착하질 않아 텅 빈 집안은 살풍경스럽고, 전학 간 학교 역시 낯설기만 하다. 게다가 세계가 나 중심으로 도는 줄 알았던 유아기를 지나 세계와 분리된 자아에 눈 뜨는 사춘기가 도래했으니. 슬픈 것 같기는 한데 표현에는 서툴고, 마냥 기쁘고 싶은데 기쁘지 않고, 그래서 두렵고 화나고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감정의 혼란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환경 변화와 성장 과정에서 오는 감성과 인격의 변화를 다섯 가지 핵심 감성들의 입장에서 그려나간다. 황금빛을 내뿜는 파란 머리칼의 늘씬한 아가씨 기쁨(Joy), 작은 키에 통통하고 안경 낀 파란 소녀 슬픔(Sadness), 똘똘해 보이는 초록색 아가씨 까칠(Disgust), 네모진 빨간 소년처럼 보이는 버럭(Anger), 그리고 깡마른 보랏빛 소심(Fear), 이 다섯 가지 감정 캐릭터들의 모습이나 표정도 재미있지만, 어두컴컴함 무의식의 영역, 망각의 깊은 수렁, 생각 기차, 꿈의 제작소, 주인공이 아기였을 때 상상 속 친구였던 빙봉(코끼리 얼굴, 너구리 꼬리, 솜사탕 몸통을 가진), 본부와 연결되어 허공에 떠있는, 인격의 여러 측면을 나타낸 공상의 섬, 가족의 섬, 우정의 섬, 정직의 섬 등은 볼 수 없는 내면을 진짜로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해준다. 그만큼 실감난다는 말이다.

 
게다가 라일리뿐 아니라, 아빠와 엄마, 에필로그에서는 모든 출연 인물들과 강아지와 고양이의 내면까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중 엄마의 감정 본부에선 슬픔 덩치가 가장 크고, 아빠의 본부에선 버럭 덩치가 가장 크고, 라일리의 본부에선 기쁨 덩치가 가장 큰 것이 눈에 뜨인다. 핵심 감정들이 어떤 비율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따라 각 사람의 성격이 결정된다는 걸 가시적으로 보여 준 것 같다. 심리학자들의 자문을 받았다고 하니, 상당히 계산된 그림일 것이다. 다혈질로 보이는 아빠, 사려 깊고 따뜻한 엄마, 씩씩하고 명랑했던 라일라, 이들 각자의 다섯 가지 감정의 덩치나 태도나 표정들이 섬세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된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라일라가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슬픔, 즉 눈물이 라일리를 진정시키고 성장시킨다는 걸 깨닫기까지 여러 날이 걸린다. 기쁨과 슬픔을 누른 채 두려워하고, 모두를 밀어내고, 걸핏하면 분노하던 라일라가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고, 결국 거짓말을 하고 엄마의 카드를 훔쳐 가출을 감행하고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을 때, 감정 조절 장치들은 고장나고 새카맣게 변해 버린다. 머릿속 허공에 떠있던 , 공상의 섬, 정직의 섬, 우정의 섬이 무너져 내리고 가족의 섬마저 마구 흔들린다. 질서정연하던 기억체계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에 다급해진 기쁨이 슬픔을 데리고 무한복제한 상상 속 남자친구를 이용해 높이 솟은 감정 본부를 향해 날아간다. 본부의 유리벽에 가로막히자 이번에는 본부 안에 있던 까칠이 버럭의 화를 돋우어 그 불길로 유리에 구멍을 낸다. 드디어 합체한 다섯 감정, 그런데 기쁨이 슬픔에게 망가진 조종 장치를 고치라고 한다. 자신이 모든 걸 망쳤다고 자책하던 슬픔의 눈이 커진다. 내가? 어떻게? 그런데 슬픔이 손을 대자 기계들이 정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좌절하고 냉담하던 라일라가 정신을 차린다. 출발하려던 버스에서 내려 엄마, 아빠에게로 달려가 품에 안겨 펑펑 눈물을 쏟는다. 낯선 환경이 싫고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결론은 디즈니 만화답게 고향으로 돌아가 좋아하는 아이스하키도 열심히 하고 남자친구도 생길 예정이라나 뭐라나?

조울증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조증 상태에선 즐거운 것까지는 좋은데 하루 종일 구름 탄 양 즐겁다 못해 흥분 상태이다. 반대로 울증 상태에 들어가면 슬프다 못해 축 늘어지고, 염세에 빠지고, 죽고만 싶다. 그런데 통통 튀는 기쁨에 슬픔의 푸른색을 입히면, 잔잔한 기쁨이 되고, 어깨가 축 처진 슬픔에 기쁨의 황금빛을 둘러 주면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된다. 슬픔의 푸른색과 기쁨의 황금빛이 색상 변주를 할 때마다 인생은 다채로워지고, 깨달음과 지혜의 깊이가 생겨난다. 버럭과 소심과 까칠은 위험하고 변화무쌍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지키는 감성들이라면 기쁨과 슬픔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철학과 예술을 창조하고, 사랑을 성장시키는 감성인 게다. 감성의 시각화에 낚인 나는 하루 종일 감성들을 캐릭터로 바라보는 중이다. 꽤 괜찮은 감성 놀이인 것 같다. 조절도 잘 된다.

가슴 언저리를 손으로 쓸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는 슬픔의 강 속에서 보낸 세월이 1년을 넘었다. “도무지 흥이 나질 않아.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라고 엊그제 남편에게 토하듯이 말했다. 남편은 비상사태가 벌어졌다고, 마누라 지켜야 한다고, 더 잘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통장 만들어 매달 100달러씩 자동 이체하며 엄마 꺼라 말하던 철부지 막내는 한국에 다녀와도 될 만큼 돈이 쌓였다고 “엄마, 한국 가” 한다. 엄마가 중증요양원에 입원한 뒤부터 기뻐하면 안 될 것 같아 기쁨의 수액을 말라붙게 하고 슬픔만 키웠더니 적재적소에 눈물이 나오기는커녕, 버럭과 까칠만 남은 허무의 무저갱에 갇힌 느낌이었다. 그랬다. 만화영화가 가르쳐 주듯이 기쁨 없는 슬픔, 슬픔 없는 기쁨은 기쁨도 슬픔도 아니었다. 엄마를 위해서 또 나와 다른 가족을 위해서 다섯 가지 핵심 감정들이 제 역할을 잘해야 한다는 걸 만화가 새삼 일깨워 주었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PIXAR가 제작하고 월트 디즈니 영화사가 개봉한 3D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지난 6월에 개봉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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