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자기중심적인 교만, 욕망의 무한한 확대

교만은 “하나님과 같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라 했다. 인간 타락의 근본 동기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의 죄에 있다. 인간은 자기를 무한히 높여 “하나님과 같은 인간”(Homo sicut deus)이 되고자 한다.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은 인간은 “중심이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세운다. 이제 각자의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 자기중심적인 인간에겐 한계가 없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는 모든 행위와 삶에 대한 아무런 규범도 가지고 있지 않다. 스스로 중심이 된 인간의 자기 판단과 자기 주장이 규범이 되고, 그 스스로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

그는 무한한 욕망 가운데 살아간다. 무한한 성욕, 소유욕, 권력욕, 명예욕, 지식욕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 이를 고전적으로 자기중심적 욕망의 무한계성, 무한한 욕망(concupiscentia:욕정,欲情)이라 말한다. 여기서 욕정은 어거스틴이 생각하는 색욕보다 더 광범위하게, 욕망을 확대시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권력에 대한 무한한 욕구가 네로를 낳았고, 무한한 성적 충동이 돈 주앙을 낳았고, 무한한 지식욕이 파우스트를 낳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이 욕망 속에 살며, 할 수만 있다면 욕망의 확대를 원한다. 욕망을 채우려고 자기를 주장하고 그 욕망을 확장하고자 할 때,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 충족의 대상이 되며, 이웃의 기본적인 가치와 삶의 존엄성마저 유린해 인간은 인간의 늑대(homo homini lupus)가 된다. 그리하여 시기, 질투, 미움, 위선, 거짓, 교만, 속임, 파벌, 중상, 모략, 살인 등의 죄악이 일어난다. 신의와 온정과 자비는 사라지고, 난폭하고 잔인한 마음이 인간을 지배한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가복음 7:21-23)

예수님이 언급하신 악의 목록 12가지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을 표현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을 가장 우선으로 그 다음에 이웃을 그리고 자신을 마지막에 두지 못했을 때 나오는 생각과 행동들이라고 존 스토트 영국성공회 신부는 해석한다. 즉 악의 핵심은 자기 중심이라는 것이다. 결국 한계를 모르는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하나님, 이웃, 그리고 참된 자기 자신과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관계의 분리와 단절이 교만의 현실이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온다. 바리새인은 보란 듯이 서서 이렇게 기도한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11절)

이웃을 공격하고, 비판하고, 무시해서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자기 스스로 중심이 되고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교만의 형태이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 : Mere Christanity)』에서 교만은 하나님께 맞서는 마음이고, 남과의 비교이며 경쟁이라고 말한다. 교만은 본성상 경쟁적이다. 그래서 교만은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2. 라인홀드 니버의 4가지 교만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에서 교만을 네 가지로 나누어 정리했다. 권력의 교만, 지적인 교만, 도덕적 교만 그리고 종교적 교만이다.

첫째, 권력의 교만은 생명의 유한성과 의존적 특성을 망각하고, 자신을 자기 창조자이며, 자기 운명의 주관자로 믿는 데서 비롯된다. 권력의 교만은 사회적 권력을 장악한 개인이나 집단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그 권력을 더욱 안전하고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물질을 지배하고, 사람들을 지배하고자 한다.

둘째, 지적인 교만은 무지에서 생겨나며, 나아가 유한한 지식을 궁극적 지식으로 위장한 데서 연유한다. 지적인 교만은 인간의 지식이 한시적인 것을 망각하고 초역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이성에서 비롯된다. 지적인 교만은 다른 사람 안에서 발견한 지식의 모호성과 한계가 자신의 지식에도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셋째, 도덕적 교만은 자신의 선을 무조건적인 도덕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남의 행위를 자기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질책하는 독선을 가져 온다. 도덕적 교만은 자신의 한정된 도덕을 궁극적 도덕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상대적인 도덕 기준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낳으므로, 자기 기만과 자기 위장으로 표명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에 견주어 의인을 신랄하게 비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넷째, 종교적 교만은 자기를 신격화하는 것이다. 편협한 지식과 무조건적인 선을 결합해 신의 재가를 얻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보지만, 자기의 정의가 남의 정의보다 더 신에게 가깝다고 생각한다. 최악의 자기 주장은 종교적 교만이다. 여기서 신은 자기 주장의 동맹자로 동원된다. 최악의 지배계급 형태가 종교계급이다. 예를 들어,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중세 가톨릭의 종교재판이 여기에 해당된다. 편협, 독단, 독선, 자만, 잔혹성의 최후의 형태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것을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다. 죄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죄는 종교적 교만이다.

특히 니버는 “집단의 교만”을 지적한다. 사회적, 정치적 집단치고 자기중심적이고 우상 숭배적이 아닌 것이 거의 없다. 집단은 자신의 가치를 무조건적 가치라고 주장한다. 집단의 법칙이 궁극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개인에게 충성과 복종을 요구한다. 집단적 이기주의는 개인의 상실을 가져온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언적 종교의 발단은 국가의 자기신격화에 대한 도전이었다. 구약성서의 아모스를 비롯한 예언자들은 신과 국가의 단순한 동일시, 또는 신에 대한 국가의 반역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은 도덕과 정치를 단순히 동일시함으로써 도시국가의 자기절대화의 죄를 비판하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오직 예언자적 종교에서만 국가의 교만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집단은 크건 작건 간에 모두 자기절대화에 빠져 있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이를 비판한다. 알렉산더가 그에게 잡힌 해적에게 “너는 어찌하여 바다를 어지럽히느냐?”고 물었다. 해적은 힘있게 대답했다. “당신은 어째서 세계를 어지럽혔습니까? 나는 작은 배로써 그렇게 했기 때문에 ‘도적놈’이라고 불리지만 , 당신은 막강한 해군력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정복자’라고 일컬어지는 것 아닙니까?”

3. 나는 교만한 사람

교만에 대한 성서말씀과 여러 가지 해석을 읽고 정리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내린 결론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나 자신을 드러내 인정받기를 원하고, 나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따르기를 원했던 것이다.

C. S. 루이스는 내가 얼마나 교만한지를 알 수 있는 쉬운 방법을 가르쳐 준다.“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알아 주지 않거나, 내 일에 참견하거나, 은인 행세를 하거나, 자랑할 때 당신 안에 그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가?” 사실 우리 모두에게 그 마음이 있다. 우리 모두 자기중심적이며, 비교하고 경쟁하는 마음, 즉 교만한 마음이 있다. C. S. 루이스는 교만에 이르지 않는 첫 번째 단계는 “‘내가 교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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