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에 대하여(1)

축하 인사 한 마디 못하는 최고 지성인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쓴 『인생수업』(2006)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러 해 전, 운좋게도 시카고 의대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교수로 뽑힌 적이 있다. 이것은 교수들에게 매우 명예로운 일이다. 교수라면 학생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내가 상을 받게 되었다는 발표가 나던 날, 다들 평상시와 다름없이 친절하게 나를 대했다. 하지만 상에 대해 언급하는 교수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미소 뒤에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저녁 때가 되자, 아동심리학자인 동료 교수가 멋진 꽃다발을 보내 왔다. 카드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질투가 나서 죽을 지경이지만, 어쨌든 축하해요.’ 그 순간부터 나는 이 남자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식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언제나 알 수 있을 것이며, 내 곁에 있어도 안전하다고 느낄 것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신에 가까워지려면 자신의 어두운 면과 결점에 대해서도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안심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34-35쪽)

왜 최고의 지성인들인 교수들이 동료에게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를 할 수 없었을까? 단 한 사람만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면서 축하의 꽃다발을 보냈다. “질투가 나서 죽을 지경이지만, 어쨌든 축하해요.” 엘리자베스 로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질투, 또는 시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우리 모두 내면의 어두운 면에 대해 솔직해졌으면 좋겠다.

오셀로의 이아고 “난 비열하게 태어났어”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오셀로(Othello)’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를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오셀로는 용맹스런 장군이다. 하지만 그는 질투와 의심에 사로잡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아름다운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그 자신도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데 나는 오페라를 감상하면서, 주인공은 오셀로가 아니라 이아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아고는 질투의 화신이다. 그는 누구나 질투한다. 그는 본래 오셀로의 기수였는데, 부관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부관이 되자 이아고는 오셀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파멸로 몰아간다. 오셀로가 이방인(무어인, 흑인)인 것도 싫고, 용맹한 장군인 것도 질투한다. 베니스의 아름답고 젊은 여인 데스데모나를 아내로 둔 것도 질투한다. 부관이 된 케시어도 싫어하고 질투한다. ‘나는 믿는다(Credo)’라는 제목의 노래를 이아고는 이렇게 부른다. “나는 그의 모습 그대로 나를 창조하신 잔인한 신을 믿지, 그리고 노여워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노라. 비열함의 세포나 원자로부터, 난 비열하게 태어났어. 난 비열한 놈이야. 왜냐하면 난 인간이고 내 몸속에서 태초의 악함을 느끼니까. 그래! 이것이 나의 믿음이야! 난 교회의 과부처럼 확고부동하게 믿는다,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악한 것들을. 난 운명의 명령을 받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정직한 사람은 얼굴이나 마음을 흉내내는 배우라고 믿는다. 그의 모든 존재는 거짓이야! 눈물, 키스, 눈짓, 희생과 영광! 요람의 세포에서 무덤의 구더기까지 인간은 악한 운명에 희롱당하고 있지. 이 모든 헛고생 끝엔 죽음이 있지.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죽으면 끝이야, 천국이란 허황된 이야기지.”

이아고가 노래하는 악, 시기, 질투, 죽음이 너무나 장대하다. 음산하지만 우렁찬 바리톤 음색이 장내에 엄습한다. 질투의 비열함이 온 우주를 덮어 버리는 것 같다. 시기와 질투는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의 세포 속에 들어 있을까? 시기와 질투의 악한 속성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일까? 시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같은 부류라고 생각한 사람이 자기보다 더 잘 나가는데 시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잘 생기고 능력도 뛰어난 친구를 시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웃이 남편의 승진을 자랑하고, 아들 딸 자랑을 할 때, 의기소침하지 않고 시샘하지 않을  수 있는 여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것에 대한 답이 성서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라고 믿는다. 인류 최초의 형제 이야기를 성서는 질투와 살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질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이는 가인. 인간에게는 질투라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성서가 가르쳐 주는 것 아닐까? 결국 우리 모두는 시기와 질투 때문에 형제를 죽인 가인의 후예들이지 않은가?

부끄러운 나의 이야기

2004년, 내 이름의 단행본을 처음 출판하였다. 출애굽기 성서연구교재였다. 이민자의 삶이 출애굽의 여정과 같아 보였고, 내 아버지의 삶 역시 출애굽의 여정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 칠순 기념으로  책을 출간했다. 그동안 교회에서 했던 출애굽기 성서공부 자료들을 모아 출판한 다음, 동료와 선후배 신부님들께 책을 몇 권씩 선물로 드렸다.

그 뒤 우연히 선배 신부님 집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 책장에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 궁금해 구경하는데, 몇 권의 책들이 거꾸로 꽂혀 있었다. 꺼내서 확인을 해보니, 맙소사! 그것은 선물로 준 내 책들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그 선배는 나를 계속 격려해 준 분이었다. 내가 진행했던 소책자 발간 작업, 교육자료 편찬 작업을 격려하고 후원해 준 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출간한 단행본들이 거꾸로 꽂혀 있다니! 충격이었다. 물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책을 팔아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 후 교회에 필요한 몇 권의 단행본을 더 출판했지만 그분에게 책을 팔아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나보다 한 살 더 많다. 서울 시장을 지낸 오세훈 역시 나보다 한 살 더 많다. 비슷한 연배라고 해서 그들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고등학교 시절 한 반에서 같이 지낸 동창이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동창이 자랑스럽다. 질투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교 동기나 같은 날 부제와 사제가 된 동기들이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시샘이 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 그 친구,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 못했는데!” 그 친구는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나는 이민 사목의 현장에서 계속 헤매고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 질투는 정말 이상한 감정이다.

시기, 질투는 정말 죄악일까? 그 감정은 어디서부터 생기는 것일까? 이런저런 질문을 해본다. 무엇보다 그 감정을 인식하고 그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기와 질투를 극복하는첫 걸음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잠언 14:30, 새번역).

(* 시기나 질투에 대해서 개념을 따로 정의하지 않고 폭넓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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