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 

이 구절의 일차적인 뜻은 죄에 대해서 눈을 뽑아버릴 정도로 단호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뜻 이면에는 “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평소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인 폴 고갱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육신의 눈이 아닌 다른 눈으로 보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갱에게는 육신의 눈 이외의 다른 눈이 있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눈보다 더 중요한 눈은 어떤 눈일까요?

박환이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2013년 10월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어 시각장애 1급인 장애자로 살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어떤 빛에도 반응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는 시력을 잃기 전에도 화가였고, 시력을 잃은 지금도 화가입니다.

어느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박환씨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2013년 10월, 저는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화가인 저에게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저 하루 종일 거실에 나와 멍하니 앉아 있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이 다시 한 번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라고 제안을 하더군요.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버럭 화를 냈습니다. 빛을 못 보는데 그림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한 번 해보자고 매달리는 여동생 때문에 못 이기는 척 캔버스 앞에 앉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어렵사리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불안함과 좌절감이 느껴지지 않고 오롯이 그림에만 집중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느 순간에는 시력이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어요. 그림 속 풍경에 빠져 그 안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힘들었지만 제가 평생 해온 게 그림밖에 없었어요.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게 그림뿐이니까 다시 시작하게 됐죠. 물론 다시 그림을 그리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연필로 스케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죠.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실과 바늘을 이용하는 것이었죠. 손의 감각을 이용해 스케치를 하는 거죠. 실에 풀을 붙여 스케치를 해요. 그리고 핀을 꽂아서 어디인지 구분을 하죠. 그 후에 굵은 실을 덧바르고 청바지 등 입체감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요. 그 위에 색을 입혀요. 다들 어떻게 색을 구분하는지 궁금해 해요. 그런데 물감마다 조금씩 농도가 달라요. 미세한 농도 차이를 이용해서 색을 구분하죠. 그렇게 일 년 정도 시간이 지나니 예전 느낌이 돌아왔어요. 사람들은 시력을 잃기 전과 그림의 느낌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시력을 잃기 전에는 어둡고 무거운 주제의 그림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시력을 잃고 난 후에는 왠지 모르게 아름다운 풍경을 자꾸 그리게 돼요. 특히 ‘봄’을 많이 그리게 됩니다. 아무래도 봄은 시작이잖아요. 희망을 갖고 기대감을 갖게 되는 봄이라서 자주 그리는 것 같아요. 올해 초에는 시력을 잃은 뒤 첫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전시회를 보러 온 관람객들이 하나같이 저한테 고맙다고, 덕분에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고 간다고 말해줬습니다. 처음 그런 말들을 들었을 때 조금 의아했습니다. 시력을 잃고 세상에서 제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죠.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나한테 이러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전시회에 찾아오신 분들이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사연을 이야기해 줬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저보다 더 힘든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실 저는 타인에게 희망을 주려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어요. 제 이름을 널리 알리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이번 전시를 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남산편지」정충영).

박환씨는 시력을 잃은 뒤에야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또 다른 눈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육신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눈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 눈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사용하고 있다면, 그 눈으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슥 9:1).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8).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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