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디올러스
글라디올러스

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

글라디올러스(Gladiolus)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나라의 잔혹한 왕에게 예쁘고 마음씨 고운 딸이 하나 있었는데 병약해서 그만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딸은 살아 생전에 아버지에게 옥()으로 만든 향수병 2개를 주면서 "절대로 열지 보지 말고 무덤 곁에 같이 묻어 달라"고 했다.

왕은 향수병 2개를 딸의 시녀에게 주며 "딸의 소원대로 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그 시녀는 향수병 하나의 뚜껑을 열고 말았다. 그러자 그 병의 향수가 모두 날아가 버렸다. 놀란 시녀는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하고 향수병 2개를 그대로 무덤 옆에 묻고 돌아왔다.

이듬해 봄이 되자 딸의 무덤가에는 똑같이 생긴 꽃 두 송이가 피어났다. 그런데 하나는 향기가 넘쳐나는 반면 다른 하나는 향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왕은 그 시녀를 처형했다. 그랬더니 향기 없는 꽃에 빨간 핏물이 들고 잎은 왕의 칼처럼 변했다. 이후 향기가 나는 흰 꽃은 백합, 영원히 향기를 잃은 붉은색 꽃은 글라디올러스라고 불리게 됐다.

글라디올러스는 로마의 원예가가 라틴어 글라디우스(gladius)’에서 따다 붙인 이름인데 이는 ()’이란 뜻이다. 그러고 보니 귀족들의 노리개로 아레나 광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로마제국의 검투사 또한 글라디에이터(gladiator)인 것이 한 뿌리에서 나온 셈이다.

그래서 그런가? 서양의 칼은 대개 양날을 가진 직선형 검()이다. 이에 비해 동양의 칼은 검()과 도()로 분류된다. ()은 양날의 칼이요, ()는 외날의 칼이다. 동아시아 명검의 원조인 중국을 보자. 수세기 동안 다양한 민족들의 지배가 반복되었던 만큼 도검의 종류뿐만 아니라 기술의 역사 또한 길다. 실제로 춘추전국시대의 도검 중에 현재까지 실존 유물도 많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일본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에 보관된 ‘히젠도.’  사진 출처 - 문화재제자리찾기
중국 박물관에 진열된 월하구천검

그 중 하나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 월왕 구천(勾踐)의 청동검이다. 이러니 검()에 대해 얽힌 전설 또한 만만찮을 수밖에.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간장(干將)과 막야(莫邪)’이. 간장과 막야는 춘추전국시대 최고의 도검을 만드는 부부의 이름이지만, 이들이 만든 두 자루 검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들 부부는 천하 제일의 광석을 모아 검을 만들려고 했으나 도무지 철이 녹지를 않아 고민하던 중 아내 막야가 자신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넣자 녹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명검은 오()나라에 바쳐졌다가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손에 넣게 되었고, 그가 죽은 후 모두 부장품으로 묻혔다가 출토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월왕구천검인데, 2,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금도 녹이 슬지 않았으며 아직도 날이 살아 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일본은 검()보다는 흔히 일본도(日本刀)를 연상케 하고 사무라이를 떠올리게 된다. 10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일본도 가타나()’는 대개가 곡선형이고 외날이며 주로 사무라이 계층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들은 가타나()를 와키자시(脇差) 같은 짧은 칼과 쌍을 이루어, 다이쇼(大小)라고 불리는 두 자루를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이들을 중심으로 공격적이고 잔인한 칼의 문화가 생겨났는데 그 칼이 일반백성들에게는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인 반면, 사무라이들에게는 명예와 사회적 권력을 상징했다.

하지만 사무라이들이 칼을 주무장으로 사용한 것은 에도시대 이후이다. 이전에는 활과 창과 함께 사용하던 것을 전국시대 말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직 사무라이들만 칼을 차고 다니도록 하면서다 칼은 점차 사무라이 정신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가 일본인에 대해 저술한 국화와 칼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꽃인 국화(菊花)와 반대로 일본인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일본도 칼()에서 따왔다. 이는 칼이 사무라이 정신을 부르짖으며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는 이중성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일본 규슈 북부의 사가현(佐賀縣)과 나가사키현(長崎縣) 일대를 16세기 에도시대에는 히젠((肥前지방이라 불렀다. 이곳 히젠은 일본 자기의 발생지이자 도자기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 히젠 자기는 일본에 영향을 준 조선의 도자기 기술과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가 히젠 지역에 정착한 조선 도자기 장인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다.

일본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에 보관된 ‘히젠도’(사진 출처 - 문화재제자리찾기)
일본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에 보관된 ‘히젠도’(사진 출처 - 문화재제자리찾기)

그런데 이 지역에서 나온 또 다른 생산품으로 히젠도(肥前刀)’가 있다. ‘히젠의 칼이란 말이다.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이 만든 것으로 전투용이 아닌 사람을 베기 위한 살상용 칼이다.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바로 이 히젠도였다. 그리고 칼집에는 글이 쓰여 있는데, ‘一瞬電光刺老狐 (일순전광자노호):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이다. 이 칼은 일본 쿠시다 신사(櫛田神社)에 귀중품으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지난 16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본 외교관이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 보낸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서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라고 고백한 내용을 담은 사실을 보도했다. 1895108일 새벽 일제와 그 앞잡이 조선인들이 궁궐에 무단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 나라의 국모(國母)를 살해한 용서 받을 수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 이번 편지 발견을 계기로 126년 전 참혹했던 시해 사건의 전말과 일본 정부의 개입 과정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면 헛수고일까?

우화 하나: 강가에서 개구리를 만난 전갈이 자신을 등에 태워 건너달라고 부탁한다. 개구리는 전갈의 독침이 두려워 거절한다. 그러자 전갈은 강을 건너다 독침을 찌르면 둘 다 죽을 텐데 찌를 까닭이 있겠냐고 설득한다. 결국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는데 강가에 거의 다다를 즈음 전갈은 독침으로 개구리를 찌른다. 개구리는 죽어가며 왜 찔렀냐고 묻자 전갈은 자신도 모르게 본능으로 찔렀다는 대답과 함께 강에 빠진다.

전갈의 본능 DNA를 닮은 나라답다는 생각과 함께 떠오른 글이다.
글라디올러스 꽃말들: ‘밀회', '무장', '묻어둠

* 김학천 필자는 2010년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서울대와 USC 치대, 링컨대 법대를 졸업하고,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온타리오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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