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궁가의 호랑이가 아닌 호질의 호랑이처럼 당당하고 올바른 기운이 가득하길"

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

서양에 오페라가 있다면 우리에겐 판소리가 있다. 오페라가 무대와 객석이 차단된 채 일방 전달인 것에 반해, 판소리는 소리꾼과 청중들 간에 열린 양방 소통 대화의 장(場)이랄 수 있다. 이는 오페라의 아리아(Aria)와 레시타티브(Recitativo)에 상응하는 소리와 아니리 외에도 판소리는 추임새(얼쑤~ 등)뿐 아니라 청중들이 예기치 않게 던지는 말에도 즉흥적으로 화답해 내는 재치와 예지를 겸한 소리꾼과 민중의 어울림 때문이다.

또한 오페라가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인 것과 달리, 판소리는 오랜 세월을 통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다양한 계층의 청중들을 포용할 수 있는 폭과 유연성을 지니도록 발전되어 온 구비서사시 극(劇)이다.

그 중 현존하는 5마당 중에 「수궁가(水宮歌)」가 있다. 흔히 ‘별주부전’이나 ‘토끼의 간’으로도 불리는 이 작품은 인간 사회를 풍자한 극으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부패 사회에서 싸워 이겨 살아남으려는 투쟁의 이야기다.

남해 용왕이 향락을 즐기다가 병을 얻었다. 도사들이 백방의 약은 효험이 없고 다만 토끼의 간만이 유일한 처방이라고 한다. 이에 용왕이 뭍에 나가 토끼를 잡아오라고 신하들에게 지시하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자 주부 벼슬을 하고 있던 자라가 자원한다.

수궁을 떠나 육지에 도착한 별주부는 온갖 날짐승, 길짐승들이 모여 서로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자리 다툼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동물들이 온갖 명분으로 자신이 최고라며 나서지만 결국 호랑이가 위세로 모두를 누르고 상좌(上座)를 차지한다.

별주부는 그 호랑이를 토끼로 착각하고 그가 ‘토생원’인지 물어본다는 것이 발음이 헛나가 ‘호생원 아니신가요?’ 하면서 호랑이와 맞부딪치게 된다. 최근에 ‘이날치’라는 밴드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범이 내려온다’는 부분이다.

판소리 그림 동화집 표지
판소리 그림 동화집 표지

‘범 나려온다 범이 나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누에머리 흔들며 양귀 쭉 찢어지고/ 몸은 얼쑹덜쑹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동이 같은 앞다리 전동 같은 뒷다리/ 새 낫 같은 발톱으로 엄동설한 백설 격으로/ 잔디 뿌리 왕모래 좌르르르르르 헛치고/ 주홍 입 쫙 벌리고 자라 앞에 우뚝 서/ 워리렁 허는 소리 산천이 뒤엎고 땅이 툭 꺼지난듯/ 자라가 깜짝 놀래 목을 움치고 가만히 엎졌것다.’

호랑이는 생전 처음보는 자라를 보고 잡아먹으려 하자 자라는 자신이 두꺼비라고 둘러댄다. 하지만 이는 통하지 않고 호랑이가 덤벼드는데, 순간 자라가 재빠르게 그 뒷다리를 물자 호랑이는 그만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내뺀다. 그런데 우스운 일은 압록강까지 도망간 뒤 호랑이가 하는 말이다. 자신이 재빠르고 날랬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며 안도하는 대목이다. 자신이 지상에서 최고라던 호랑이가 일개 자라에게 당해 달아난 주제에도 허세와 무능으로 일관하는 모습 때문이다.

이는 박지원의 소설 「호질(虎叱)」에 등장하는 북곽 선생의 위선과 다를 바 없다. 산중에 밤이 되자 호랑이들이 사람을 잡아 먹으려는데 마땅치가 않았다. 의사를 잡아먹자니 의심스럽고 무당은 불결하게 느껴지고, 해서 청렴한 선비의 고기를 먹기로 하였다.

이제 호랑이들이 마을로 내려왔는데 마침 유학자 선비 하나가 열녀 표창까지 받은 청상과부 집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과부에게는 성(姓)씨가 다른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다. 이들은 방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이는 필시 여우가 둔갑한 것이라 믿어 몽둥이를 들고 뛰어드는데 선비가 놀라 도망치다 그만 분뇨통에 빠졌다.

간신히 기어 나왔는데 보니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지 않은가! 머리를 땅에 붙이고 목숨을 빌었다. 그러자 호랑이는 더러운 선비라 탄식하며 유학자의 위선과 이중성을 크게 꾸짖고는 가버렸다. ‘호랑이의 질타’ ‘호질(虎叱)’이었다.

날이 새어 일터로 가던 농부들이 그때까지도 엎드려 있던 선비를 발견하고는 그 연유를 물어보자 그는 그 처지에서마저도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조심하기 위한 의식’이었다며 요설을 늘어 놓았다.

옛부터 호랑이는 신통력을 지닌 영물(靈物)이자 의(義)를 지키는 동물로 여겨 왔다. 또 호랑이가 까치나 소나무와 함께 있으면 ‘새해를 맞아 기쁜 소식이 들어온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였다.

2022년 검은 호랑이의 해(壬寅年)를 맞아 부디 수궁가의 호랑이가 아닌 호질의 호랑이처럼 당당하고 올바른 사회, 아울러 군자나 숨은 선비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상징하는 ‘출산호도(出山虎圖: 산에서 걸어나오는 호랑이)’의 기운이 가득하길 바란다.

* 김학천 필자는 2010년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서울대와 USC 치대, 링컨대 법대를 졸업하고,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온타리오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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