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새 집무실 시대에 걸맞게 개방적이고 실리적인 민주적 공간 구조 거듭나야"

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


흔히 임금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궁궐 안에는 여러가지 궁(宮)이 있다.

왕이 정사를 돌보고 거처하는 정궁(正宮), 상왕이나 대왕대비가 머물거나 왕이나 왕세자 비를 맞아들이기 위한 별궁(別宮), 정궁에 변고가 있거나 왕들의 요양을 위해 잠정적으로 머무는 행궁(行宮) 혹은 이궁(離宮)이 있다. 이 중 정궁은 그야말로 왕실의 으뜸 궁궐이고 이궁은 일종의 정궁을 보조하는 궁궐이다. 말하자면 경복궁은 정궁이고 창덕궁이나 덕수궁은 이궁인 격이다.

1104년, 고려 숙종이 나라에 여러 재난이 계속되자 이를 막기 위해 풍수지리설을 좇아 북악산 남쪽에 이궁(離宮)을 세웠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경복궁을 창건하고 이곳을 후원으로 사용했는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던 터에 태종이 이곳 숲을 지나다 변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다가 일제(日帝)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총독 관저를 짓고 뒤편에 총독 관사를 두었다. 북악산과 남산을 잇는 산의 정기가 흐르는 줄기를 잘라 왕실의 기(氣)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던 것이라 한다.

이후 해방이 되자 미 군정 사령관 관사로 사용됐다가 1948년 정부 수립 후엔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면서 옛 이름대로 다시 경무대로 불렀고 4·19혁명 뒤 윤보선 대통령은 관저 지붕의 푸른 기와에서 이름을 따 청와대(靑瓦臺)로 바꿨다.

그런데 지금의 청와대는 불통과 단절 그리고 왕조시대를 연상케 할 정도로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구중궁궐’ 의 권위주의 이미지를 풍긴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우선 현재의 청와대는 노태우 대통령 때 만들어졌는데 어설픈 양식이라는 비판이 따랐다. 한국적으로 하기 위해 목조 흉내를 냈지만 콘크리트 건물에 색을 입히고 그 위에 개량 기와를 얹은 족보 없는 건물이란 이유다. 당시 건축계에서는 이를 ‘박조(朴朝, 박정희와 조선시대 건축을 합친 말) 건축’이라 부르며 조롱했다고 한다.

기존 청와대는 5월 10일 새 정부 출범에 맞서 공원으로 개방한다.

게다가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청와대 본관과 생활 공간인 관저, 보좌관과 비서진이 근무하는 3개의 비서동, 취재진이 상주하는 춘추관 등이 모두 멀리 떨어져 있다. 대통령 관저는 본관에서 200m 정도 떨어져 있고 비서동에선 600m이며 비서동은 직선 거리가 500m 정도나 되고 비서실장이나 수석비서관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선  2개의 경비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15~20분 정도 걸린다. 이 때문에 참모들이 하루 종일 대통령을 못 만나는 경우도 많을 뿐 아니라 대통령이 집무실에 있는지 관저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고 한다.

내부는 더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웅장한 본관 2층의 대통령 집무실은 규모부터 권위적이다. 운동장 만큼이나 크게 느껴지는 집무실에는 대통령이 사용하는 책상과 회의용 탁자뿐인데 출입문으로부터 책상까지의 거리가 15m나 된다. 구조 자체가 사람을 주눅 들게 하다 보니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간 고위 관료가 뒷걸음질쳐 나오다 넘어졌다거나 너무 긴장해 오줌까지 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본관 전체 면적은 25평대 주거공간의 1,000배라는 계산이다. 청와대 내에서 대통령을 마주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라는 거다. 대통령과 참모진 간의 거리를 좁히는 실무형 구조로 바꿔야 한다는 제언이 나오는 이유다.

* 김학천 필자는 2010년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서울대와 USC 치대, 링컨대 법대를 졸업하고,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온타리오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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