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


하루는 김 삿갓이 배도 고프고 날이 저물자 하룻밤 묵고 갈 만한 집을 발견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때마침 나온 사람은 모친상을 당한 상주였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청하는 김삿갓에게 "시장하실 테니 없는 찬이나마 식사 대접은 하겠습니다." 하면서 자신은 본디 신분이 천하다보니 글을 몰라 모친이 돌아가신 것을 알리지 못해 안타까운 처지인지라 부고(訃告) 한 장 써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자 김삿갓은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요, 내가 써 주리다." 하고는 차려 준 밥을 허겁지겁 먹고 나서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류류화화(柳柳花花)!’라 써 주었다. 류류화화(柳柳花花)를 직역하면 ‘버들버들 꽃꽃’이니 이는 ‘버들버들 하던 몸이 꼿꼿’하게 죽었다는 뜻이고 삶과 죽음은 곧 류화(柳花)인 셈이다. 

신라 혜통 스님이 당나라에 있을 때 그곳 공주의 병마에 붙은 용을 쫓아 주었는데 화가 난 용(龍)은 신라로 들어가 많은 사람을 해쳤다. 이를 당나라 사신으로 와 있던 정공으로부터 전해들은 스님은 신라로 돌아와 그 용을 다시 내쫓아 버렸다. 그러자 용은 정공에게 한을 품고 버드나무로 변신해 그의 집 앞에서 자라났는데 정공은 이를 모른 채 그 버드나무를 무척 좋아하고 아꼈다.
 
후에 효소 왕이 승하한 부왕의 장례로 길을 닦다가 정공의 집 앞에 있는 버드나무를 없애려고 하였으나 정공이 자신의 목은 벨 망정 버드나무는 벨 수 없다고 하자 왕은 그의 목을 자르고 집과 함께 묻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용은 혜통 스님의 설법에 감읍하고 참회했다.  

이런 전설의 버드나무는 언 땅이 녹고 봄이 오면 다른 식물보다도 먼저 연둣빛 새싹을 내고 노란 꽃가루를 흩날리며 봄을 알린다. 해서 봄을 ‘유색(柳色)’이라고도 하는데 새 생명의 부활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가? 버드나무는 지금도 몽골에서는 생명의 상징인 동시에 희생이 따르는 나무로 여긴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 모친의 이름도 류화(柳花)였다. 그래서인지 고구려는 몇 번의 천도 끝에 버들이 우거지고 꽃이 만발한 마을을 찾아 류화(柳花)라 하고 수도로 정한 후엔 류경(柳京)이라 불렀는데 이곳이 바로 오늘의 평양이다.

버드나무는 평양에서도 특히 대동강변에 많다고 한다. 해서 조선 중기 시인 임제는 대동강 가에 있는 버드나무를 꺾어 주며 헤어지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노래했다. ‘이별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꺾는 버들 / 천 가지 다 꺾어도 가는 님 못 잡겠네 / 어여쁜 아가씨들 눈물 탓일까 / 해질 무렵 안개 물결도 시름에 잠겨 있네’
 
시인뿐만 아니라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지시해 만든 노래 또한 ‘푸른 버드나무’다. ‘나무야 시냇가의 푸른 버드나무야 / 너 어이 그 머리를 / 들 줄 모르느냐?’   해서 북한은 국내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류경 이름을 곧잘 붙인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목숨을 건 필사의 집단탈북이란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곳이 중국에 있는 북한 류경 식당이었고 이들 젊은 여성 종업원들 소속 또한 평양 류경 호텔이었다니 이 모두가 왜 하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류화 이름값에서 기인할까 갸웃한다면 지나친 기우일는지.

아무튼 이러한 서정적 낭만과 함께 생사(生死)를 가름하는 버드나무의 껍질은 고대 희랍의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부터 시작해 2천여 년 후 영국의 성직자 스톤 (Edward Stone)과 이탈리아 화학자 피리아 (Raffaelle Piria) 등을 거쳐 독일 바이엘 (Bayer) 회사의 호프만 박사 (Felix Hoffmann)에 의해 살리실산(Salicylic Acid)이라는, 사용하기에 안전한 알약으로 탄생했다. 감기, 몸살, 두통약이자 심장병 예방약인 아스피린이다.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 승무원들에게도 지급됐고, 전세계 인류가 하루에 1억 정을 복용하고 연간 600억 정 이상이 소모되며,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약인 아스피린! 세상에 나온 지 120년이 되도록 아직도 그 이름값을 하는 용한 약이다. (여담이지만 아스피린의 발명자인 호프만 박사는 헤로인도 만들어냈다. 합법 의약품과 금지 의약품을 동시에 개발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때 아닌 버드나무 이야기가 코비드 사태 통제 불능에 빠진 북한에서 웃지 못할 안타까운 이야기로 전해온다. 지난 15일 북한 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코로나 환자 민간요법으로 일종의 자가 치료 방법들을 소개했는데 그 중 ‘금은화(花)를 한 번에 3~4g씩 또는 버드나무 잎을 한 번에 4~5g씩 더운 물에 우려서 하루에 3번 먹으라’고 한 대목이다.

아스피린조차 없을 정도로 열악한 북한 보건 의료 상태가 놀랍고 안타깝다. 모쪼록 버드나무가 가진 상징 중 희생보다는 생명의 힘이 더 강한 효력을 발휘하길 바랄 뿐이다. 

* 김학천 필자는 2010년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서울대와 USC 치대, 링컨대 법대를 졸업하고,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온타리오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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