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문장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실질문맹률’ 75%에 이르러

2017년 데이터(출처-고용노동부 아빠넷)
2017년 데이터(출처-고용노동부 아빠넷)

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

오래 전 읽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할머니가 "평생 집밖에 있는 음식점에서 식사하지 않았다"며 성서에서 말하는 "외식하지 말라"는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았음을 자부했다고 한 거다. 아마도 이는 할머니가 외면치레를 뜻하는 외식(外飾)을 밖에 나가 식사하는 외식(外食)으로 오해한 데서 빚어진 일일 거다. 이러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일부 번역판은 ‘외식(外飾)’이라는 말을 ‘위선’이라는 단어로 고치긴 했지만 말이다.

한글은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로 가독성(可讀性)이 높아 해방 직후 45%였던 한국의 문맹률이 지금은 거의 1%에 가깝다. 하지만 한국어 중 우리 고유어는 25%에 불과하고 한자어가 70%에 이르며 학술용어는 90%가 넘을 정도로 대부분의 단어와 어휘가 한자로 되다보니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 또한 상당히 많다.

이 때문에 지식인이나 전문가들도 자신들의 전공분야를 제외하곤 그 단어의 의미를 얼른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렇게 되면 문해력의 문제가 생긴다.

글을 읽을 수 있는가 읽지 못하는가 하는 ‘문맹(文盲)’의 반대 개념을 ‘문해력(文解力)’이라 하는데, 이는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넘어 그 내용의 의미를 파악해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읽은 문장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실질문맹률’이 75%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 간의 소통이 어려워지고 갈등이 깊어질 수 있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게 된다.

성인의 문해력도 그렇지만, 특히 청소년과 청년 세대의 문해력 저하는 더욱 큰 문제이다. 흔한 예로, 발음의 유사성이나 변화로 이역만리(異域萬里)를 이억(二億)만리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 등은 제외하고라도 전혀 다르게 해석해 오해를 야기하는 경우도 허다해서다.

청소년들은 ‘무운(武運)을 빈다’고 하면 ‘운이 따르지 않기를 빈다(無運)’로, '사흘’을 ‘4일’로,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고지식’을 높은 지식으로, 심지어 임시로 붙인 제목이라는 ‘가제(假題)’를 ‘랍스터’로 오해한다니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 한국의 한 웹툰 작가 사인회 예약 과정에서 시스템 오류가 일어난 데 대해 주최 측이 ‘심심한 사과 말씀을 드린다’라는 공지문을 올리자, 일부 이용자들은 ‘심심한 사과? 난 안 심심한데…’ ‘앞으로 이런 글은 생각 있는 사람이 올려라’ 등의 댓글을 남기며 주최 측을 비난한 것이 논쟁이 되어 사회가 어수선하다. ‘깊고 간절한 마음으로 사과한다’는 뜻의 ‘심심(甚深)하다’를 ‘지루하고 재미없다’로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한자 교육 부재와 독서 부족 등에서 원인을 찾는다. 여기에 동영상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한 정보 습득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글을 읽고 스스로 정보를 이해해 활용 능력을 기르기 어려워진 점도 또 다른 이유로 든다.

하지만 문제는 원래 단어 뜻을 제대로 몰라서 자의적으로 틀리게 해석해 놓고는 오히려 상대방을 비난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낸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게 말한 네 잘못’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한다는 거다. 더 나아가 동조자들끼리 집단을 형성해 논란을 야기하고 생떼를 쓰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러한 태도는 반(反)지성주의를 낳게 되는 것이다.

모르는 것는 수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에게 적반하장식의 터무니 없는 공격을 하는 이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박완서 작가가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말했듯 ‘스스로 부족함을 아는 부끄러움’이다.

* 김학천 필자는 2010년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서울대와 USC 치대, 링컨대 법대를 졸업하고,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온타리오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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