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냥 있으면 가을이다.' 김대규 시인의 시 '가을의 노래' 한 구절이다. 가을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예전처럼 우체국에 자주 가지 않는다. 이메일이 발달하고 쇼핑까지 모두 컴퓨터가 해주니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그곳에 갈 일이 거의 없다. 편리하지만 무언가 아쉽고 허전하다. 
 
더구나 집배원이 다녀간 우체통엔 우편물이 넘쳐나는데도 받고 싶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어쩌다 낯익은 글씨라도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글씨도 얼굴도 심지어 음식까지도 모두 일률적으로 정형화되어 가는 마당에 육필의 손길에서 오는 친근감 때문일까, 아니면 잊고 살던 추억이라서? 
 
마찬가지로 컴퓨터가 발달하고 스마트폰이 생활화되면서 종이신문이나 종이책도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걷는 듯 보인다. 실제로 스마트폰 사용 후 상대방과의 대화가 33%나 감소했을 뿐 아니라 독서나 신문 읽기는 40% 이상이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종이 매체는 느리고 불편할 뿐이고 이에 애착을 갖는 것은 단지 익숙함이나 추억, 그리고 고유의 냄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아이트래커'를 이용해 종이책보다 인터넷에 더 익숙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을 읽을 때 시선의 위치와 그 영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조사한 실험이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다. 종이책을 읽은 그룹이 인터넷 그룹보다 시선이 더 골고루 분산되면서 책 속의 글자들을 고르게 읽었다. 이에 따라 더 많은 구절이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해 냈다. 
 
반면에 인터넷으로 책을 읽은 그룹은 사용자의 시선이 이리저리 불규칙한 분포로 움직이다가 나머지 부분은 지나쳐 가고 단지 키워드와 개별적인 문장만을 포착해 두서없이 해석한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이는 시선의 차이가 서로 다른 매체의 내용을 이해하는 깊이의 차이로 연결된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연구 결과도 있다. 소설을 정독해 읽었을 때가 대충 읽었을 때보다 주의력을 담당하는 부분의 뇌혈류량 변화가 더 활성화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전자기기를 이용해 정보를 접할 때는 '언제든 다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뇌가 기억력을 덜 발휘한다. 이는 종이로 된 책을 읽었을 때가 디지털 매체로 된 책을 읽을 때보다 집중력이 더 높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결국 종이 매체는 인터넷보다는 느리고 불편하겠지만 읽으면서 깊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힘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치 인터넷 매체가 '인스턴트 식품'이라면 종이 매체는 '평생 힘이 되는 보약'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무조건 '빨리 빨리' 하기를 좋아하는 현대인들은 전자 매체의 신속성에 빠져들며 검색에 열중하느라 종이 매체의 '느림과 깊이'를 통한 가치있는 사색의 시간을 잃고 있다. 

김연희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린 컴퓨터 글씨보다 자필의 편지가 더 반갑다/ 겉봉의 글씨만 봐도 누구 건지 알 수 있는 두근거림/ (...)  /낯익은 글씨 안에 가득 들어 있는 삶의 무게들.' 
 
좋아하는 종이신문이나 종이책의 냄새와 활자를 만났을 때의 두근거림 그리고 여유, 사색은 디지털로는 경험할 수 없는 익숙하고 낯익은 삶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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