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올해에는 우리에게서 못난 마음들이 버려지고,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


지금은 온 지구촌이 이웃같이 가깝고 곳곳의 소식도 모두 손안에 들어오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오래 전 이 땅에 온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환경 속에서 단절된 채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느라 고국을 그리워할 틈조차 없었다.
 
아내와 자식을 떼어 놓고 이 땅에 먼저 온 한 지인은 홀로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오로지 가족을 데려올 생각에 밤낮의 구분이 없을 정도로 뛰었다. 그러다가 외롭고 지치면 카세트 리코더 하나 달랑 들고 바닷가로 나가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며 위안을 삼았는데, 그 덕분에 지금은 노래방에 가면 노래 솜씨만큼은 일등이란다. 

그와 달리 다행히도 가족과 함께 온 경우는 좀 나았을까?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기에 바쁜 부모들은 아이들과 함께할 여유를 잃은 채 항상 미안하고, 죄 지은 마음만으로 그저 자식들 공부 잘하기를 바라고 사고 없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고맙게도 잘 커주었고, 어느 정도 삶의 여유도 생기면서 저녁에 모여 앉으면 가끔이나마 아이들에게 아빠와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말해 주며 옛 이야기도 들려 준다. 

그러나 이미 미국화된 아이들에게 부모는 또 다시 이방인이 된다. 그걸 모르는 아빠는 열심히 심청이 이야기를 하면서, 공양미 300석에 팔려 인당수에 몸을 던진 딸의 효심이나 심봉사의 슬픔 그리고 못된 뺑덕 어멈에 대해 제법 감정을 잡고 이야기를 엮어간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야기를 듣다가 돌연 묻는다. "심봉사는 왜 혼자가 되었어? 디보스했어?" 그러면서 소셜 워커한테는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 소셜 시큐리티는 어떻게 된 건지 시시콜콜 묻는다. 뿐만 아니라 인신매매 어쩌고저쩌고 등등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면 아빠는 어처구니가 없어지고 맥이 푹 빠진다. 

어디 그뿐이랴. 흥부와 놀부 이야기도 해준다. 부모의 사고방식으로는 놀부가 못된 심술꾸러기 형님이고 흥부는 불쌍하고 착한 동생이다. 그러나 신세대의 눈에 비친 흥부는 경제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생산적인 태도를 가지거나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 무능력자이기 때문이다. 

흥부에게는 간혹 자신의 가난을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그런 용기조차도 없다. 이에 비해 놀부는 무조건 돕기보다는 야단도 치고 심한 모욕을 통한 자극도 주면서 동생이 건강한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는 훌륭한 형님인 셈이다. 

하기야 베짱이와 개미를 보더라도 베짱이는 덮어놓고 나쁘고 개미는 무조건 좋은 식의 흑백논리로 부모 세대의 머리는 세뇌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무더위 속에서 개미가 하루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할 때 그 지겨움과 지침에 활력을 준 것이 베짱이의 즐겁고 시원한 노래 덕분이었는지 누가 알랴.  
 
다시 말하자면 일종의 위문 공연이었던 셈인데, 그렇다면 개미는 베짱이에게 공연비를 떼어 주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개미도 "네가 놀 때 나는 열심히 일했으니 모두 내 것"이라는 주장이 당연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또 어떤가? 토끼가 자만하여 방심한 사이 쉬지 않고 뛰어서 이긴 가북이. “그러니 너희도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야겠지?”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페어플레이가 아니라고 펄쩍 뛰며 따진다. 

토끼가 잠자는 동안에 슬쩍 뛰면 그것은 비겁한 속임수라는 거다. 윗사람이 가르치면 비판의식이나 토론의 기회 없이 무조건 수용하고 일방통행식으로 공부해 온 부모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의 교육 때문일까?
  

토끼 이야기 하나 더하자면, 용왕님의 병을 고치기 위해 육지로 올라와서 자신을 따라가면 높은 벼슬을 보장하겠다는 자라의 감언이설에 속아 토끼는 바닷속 용궁으로 끌려가 간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천만다행으로 자신의 허세와 자만에서 비롯된, 절체절명의 생명을 위협받는 위기를 꾀로 극복해 내는 기지를 발휘해 토끼는 탈출에 성공하고 한시름 놓는다. 아이들은 또 묻는다.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남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가진 자들의 횡포가 아니냐고.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아이들이 따지고 드는 반론이 엉뚱하고 틀리지만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의 희생을 모르는 척 슬쩍하려는 심봉사의 욕심이나 흥부처럼 남에게 무조건 도와 달라고 떼쓰는 무치심, 또 개미같이 공동의 이익을 모르는 이기심 등 그 모두가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있을까? 

또 거북이는 남의 실수를 기회로 이득을 보려는 약삭빠른 비겁함도 있고, 토끼는 토끼대로 교만하여 스스로 자초한 결과인데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남을 먼저 탓하며 불복하는 태도 또한 우리 안에 또 다른 모습으로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아하! 그러고 보니 이 주인공들 모두가 사실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었던 걸 잊고 있다가 아이들한테서 한 수 배웠으니, 그 동안의 고생이 헛수고는 아닐진저! 역시 선조들의 고전이 그냥 재미난 이야기거리만은 아니었음이라! 

2023 계묘년 토끼해가 밝았다. 부디 올해에는 우리 모두에게서 이런 모든 못난 마음들이 버려지고, 허례에 젖었던 토끼처럼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겸허하고 신실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 편집자 주 - 김학천 필자는 2010년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서울대와 USC 치대, 링컨대 법대를 졸업하고,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온타리오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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