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서 사사기에 부족 간의 전쟁 이야기 하나가 나온다. 에브라임 족은 평소에 길르앗 족을 두고 자신들에게서 도망해 나간 떠돌이들이라고 무시하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떠벌렸다. 이 때문에 모욕을 느낀 길르앗 족은 에브라임 족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 터에 길르앗 족이 암몬족을 쳐부수자 에브라임 족이 길르앗 족 지도자 입다에게 왜 자기네들과 함께 싸우러 가지 않았느냐며 너와 너희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입다는 우리가 전쟁을 치르기 전에 너희에게 알렸으나 응하지 않아 우리가 목숨 걸고 건너가 싸운 것인데 어찌 이제 다시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냐며 그들을 쳐부셨다.

패잔병 신세가 된 에브라임 족은 요단강 서편으로 도주했다. 입다는 그들이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요단강 나루턱에서 에브라임 군사들을 기다렸다. 관문 하나를 만들어 놓고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쉽볼렛(תלובש: Shibboleth)‘이라 발음을 시켜서 틀리게 ’십볼렛(Sibboleth)‘이라 하면 에브라임 사람인 줄 알고 죽였다. 이때 에브라임의 죽은 자가 42,000명이나 됐다고 한다. 하기 어려운 발음을 이용해 적군과 아군을 가르기 위한 ‘피아식별 방법’이었던 거다.

발음은 습관에 따라 말하는 사람의 출신지나 거주지에서 사용되는 언어생활을 반영한다. 언어 체계 차이로 인해 원어민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의 발음 때문에 이주자가 불편함을 겪기도 하지만, 이를 역이용한 간첩 활동 등은 물론이요, 자칫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 공격을 계기로 미국은 제2차 대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그러나 미군의 눈에는 아시아인이 다 비슷해 보였기 때문에 자신의 동맹인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일본군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해서 미군은 ‘일본인을 구별하는 법’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 그 안에 발음에 대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Lalapalooza’였다. 일본인은 L 발음을 잘 못하기 때문에 이를 시켜보면 ‘raraparooza’라고 하는 것으로 구별한 것이다.

이러한 피아식별 방법은 조선인 대학살이라는 참담한 역사도 낳았다. 1923년,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지역의 관동에 규모 7.8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대재앙으로 흉흉해진 민심이 폭동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한 일본 정부는 재앙의 원인이 조선인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불을 지른다’라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자 자경단 등이 조선인 학살을 자행했다.

▲ 일본의 화가 가와메 데이지(1889~1958)가 그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스케치’
▲ 일본의 화가 가와메 데이지(1889~1958)가 그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스케치’

일본어에는 일본인만 할 수 있는 미묘한 차이로 서로 다른 ‘ㅈ’ 발음의 탁음이 있다. 해서 조선인이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쥬고엔 고주센’(15엔 50전, じゅうごえん ごじゅっせん)을 따라 하게 한 뒤 서투르면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자비하게 죽였던 것이다. 희생자들 중에는 탁음을 발음하지 못하는 타지방의 일본인이나 중국인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하지만 주 타켓인 조선인 6,000명 이상이 학살됐다.

지난 9월 1일은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날이다. 일본은 이날을 ‘방재의 날’로 기념하고 있지만, 그 지역 재일 교포들에게는 ‘조선인 학살 추모일’이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에게 학살됐는지 명확한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도쿄도 현 지사는 역대 지사들과 달리 취임한 이후 6년 동안 추도문조차 보내지 않고 있다. 이는 엄연한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 학살)로 국제 사회에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100주기를 맞은 억울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한다.

* 편집자 주 - 김학천 필자는 2010년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서울대와 USC치대, 링컨대 법대를 졸업하고,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온타리오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