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Madame Butterfly)’은 지고지순한 게이샤의 사랑 이야기다. 나가사키의 게이샤 초초상은 미 해군 장교 핑거턴을 사랑한다. 허나 그는 그녀의 진심을 저버리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아이까지 낳고 3년이나 하염없이 기다리던 나비부인 앞에 그는 미국에서 새로 맞은 아내와 함께 돌아와 그 아이를 데려가려 한다. 초초상은 아버지의 단도로 자결하고 만다. 동양 여성은 순종적이고 수동적이라는 이미지가 담겨진 서양인들의 시각으로 본 오리엔탈리즘을 표현한 명작으로 꼽힌다.

한데 이를 반전시킨 작품이 있다. 중국계 미국 극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의 ‘M. 버터플라이’다. 나비부인과 반대로 동양인 여성에 대한 서양인 남성의 지고지순한 순애보다. 중국 북경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던 유부남 ‘르네’는 오페라에서 ‘나비부인’을 연기하는 ‘송 릴링’에게 강하게 끌린다. 수줍음이 많고 순종적이며 보수적인 모습의 릴링에게서 자신의 남자다움을 과시할 수 있음을 느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고 르네가 승진해 기밀 서류에 관여하게 되자 릴링은 미국의 베트남 정책 등의 정보를 빼내는 공산 체제의 스파이가 된다. 그러다가 릴링은 르네에게 임신했음을 알리고는 아이를 낳기 위해 사라진다.

프랑스로 돌아온 르네가 폐인같이 살던 어느 날 놀랍게도 그의 눈앞에 릴링이 아들을 데리고 나타나면서 둘은 다시 관계가 이어지고 기밀문서를 빼내 전달하는 일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르네는 릴링과 함께 체포되면서 그녀가 공산당의 간첩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자신이 20년간이나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릴링이 남자였다는 것이었다. 아이도 사실은 아무 관계 없는 아이임으로 드러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릴링은 서양 남자와 동양 여자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서양 남자들이 보기에 남자 앞에서 옷을 벗지 않는 이상한 행동을 동양 여자 특유의 보수적인 태도와 수줍음으로 여기도록 역이용했던 것이다. 결국 르네는 나비부인의 옷을 입고 초초상처럼 자결한다. 한데 이 극은 주(駐) 베이징 프랑스 대사관 직원 버나드 브루시코와 경극 배우 쉬 페이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M. 버터플라이’란 제목에서 마담(Madame)과 무슈 (Monsieur) 모두를 함축한 반전의 결말을 예고한 셈이었다.

근자에 한국에서 전 국가대표 여자 펜싱 선수가 15세 연하의 재벌 3세 남자 사업가와 재혼한다고 발표했는데, 알고 보니 남자가 아닌 여성이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의문투성이 속에 사회가 시끄럽다.

이를 보며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존 버니언이 쓴 종교 소설 ‘천로역정(天路歷程)’이다. 이 글 속에 보면 천국을 향해 가는 두 순례자가 ‘허영(Vanity)’란 도시에서 휘황찬란한 ‘시장(Fair)’에 들어섰다가 인간의 탐심과 유혹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베니티 페어(Vanity Fair)’라는 말이 나왔다. 결국 순례자는 ‘소망’이라는 동료를 만나 역경을 물리치게 된다. 이후 ‘베니티 페어(Vanity Fair)’는 사치나 허영으로 가득한 세상을 풍자하는 ‘허영의 시장’이란 뜻의 소설이 나왔는가 하면, 패션과 정치 등 상류사회의 관심거리를 다룬 미국 유명 잡지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됐다.

정치 이슈 외에 여러 분야의 주제를 다루면서도 유명인들과 명품 광고들로 상류층을 향한 중산층들의 동경을 자극해 그들의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는 패션지이지만, 기사 내용은 나름대로 깊이가 있다. 말하자면 신분 상승의 천박한 졸부보다는 의식 있는 상류층의 꿈을 파는 잡지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허영의 시장’에서 길을 잃느냐, 빠져나오느냐는 값싼 탐욕과 고귀한 꿈 사이에 그 열쇠가 있는 게 아닐는지.

* 편집자 주 - 김학천 필자는 2010년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서울대와 USC치대, 링컨대 법대를 졸업하고,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온타리오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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