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정하면서 사실 많이 주저했다. 성인등급이면서 엽기적인 설정과 잔인한 장면들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영화 속 뱀파이어가 아니라 한 신부의 갈등이다. 이제까지 목회자보다는 일반 교인에게 유익한 내용들을 소개해 왔는데, 이번 영화는 목회자의 고뇌라는 관점에서 목회자들에게 더 적합한 내용이 될 수 있다. 다른 관점을 가진 분들의 넓은 이해를 구한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신부 상현(송강호)은 환자들이 의술로 낫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갈등 끝에 신약을 개발하는 외국의 한 연구소를 찾아가 자신의 신체를 의학 실험용으로 기증한다. 목숨을 거는 실험이어서 그의 기도문이 애절하게 들린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그런데 상현뿐 아니라 다른 신부들도 자살 대신 실험 대상이 된 적이 있다고 연구소 직원이 말한다. 순수한 동기만으로 의학 실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복선이 보여진다. 자살을 생각하는 신자의 고해성사를 들으면서 자살을 만류했던 신부였는데, 자신은 정작 그 길을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실험 후, 상현은 종기 같은 것이 나고 피거품을 토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500명 중 한 명의 생존자, 아니 이제는 성자라며 가족 중에 불치병 환자를 둔 신자들이 몰려와 기도 를 해달라고 아우성이다. 정작 상현은 자신의 기도는 가족들과 환자들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일 뿐이라며 주저한다. 그 와중에 상현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 준 대부격인 한 신부에게 실험에서는 살아났지만 수혈 받은 어느 피의 영향으로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자신의 비밀을 밝힌다.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관객은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장면이다. 
어느 날 상현이 마지 못해 한 환자를 위해 기도를 하게 된다. 그는 상현의 어릴 적 친구이다. 기도를 요청한 어머니는 신부복을 입은 상현을 알아 보지 못했지만 친구는 용케 알아본다. 친구의 아내가 친구 옆에 있고 그날의 만남으로 한 신부의 삶 아니 한 여자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반전이 시작된다.
친구가 병원에서 퇴원한 뒤 집으로 초청받은 상현은 일반 사회의 삶을 구체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옛날에 여동생처럼 아껴 주었던 태주가 지금은 친구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태주를 잠시 맡겼던 그녀의 부모가 나타나지 않아 기르게 되었고 어느새 아들과 결혼까지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갈 데 없이 고아 신세가 된 태주를 길러주었다는 명목으로 험한 말과 육체적인 폭력 등 여러 학대가 방문자 앞에서도 공공연하게 일어난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 속에서 상현과 태주의 눈이 마주친다. 태주는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으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것 같다. 상현에게도 뭔가 이성적인 감정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방문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제 친구의 집에서 지인들이 모이는 수요 마작 모임에 상현이 정기적으로 나타난다. 다름 아닌 상현과 태주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태주는 이제 한술 더 떠 집에 갇혀 살기보다는 보람있는 일을 하겠다며 상현이 있는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한다. 마침내 두 사람의 육체적인 관계가 시작된다. 상현은 자신이 햇빛이 비치는 낮에는 힘을 못쓰고, 온몸에 주기적으로 돋아나는 종기를 없애려면 다른 사람의 피가 계속 필요한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래도 사랑하겠느냐며 의식 없이 누워 있는 환자의 피를 빨아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겁을 해서 떠나는 태주, 그러나 집안에서의 학대보다는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는 태주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계를 끊지 못하는 상현의 만남이 계속된다.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뾰족한 수가 안 보여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결국 상현은 자신이 의학실험용이 되었을 때의 기도를 멀리한 채 “저는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하나이다”하면서 신부복을 벗겠다고 선언한다.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 줄께요”라며 학대 받는 한 여성을 구하려던 상현의 의도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악한 일로 발전한다. 태주의 주도로 친구를 밤 낚시 중 익사시키고 사고로 가장한다. 나아가 상현의 피를 받아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걷잡을 수 없는 일탈을 벌인다. 상현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이들 또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피만 이용하지만 태주는 멀쩡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동안 학대 받으며 억눌렸던 복수심이 엉뚱한 곳으로 분출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수요 마작 모임에서 시작한다. 아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중풍에 걸린 태주의 시어머니가 마작과 눈짓으로 어렵게 의사를 전달하며 상현과 태주가 아들을 죽였음을 지인들에게 알린다. 순간, 늘 구박받으면서 나약하게만 보이던 태주가 뱀파이어 모습으로 사람들을 죽인다.

그러자 상현은 태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자동차를 달리고 달려 도착한 곳은 바닷가 절벽. 상현은 자동차 키를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린다. 태주는 돌아가려고 발버둥치지만 해는 곧 떠오르고 두 뱀파이어는 최후를 맡게 된다. 더 이상의 살인을 막으려는 신부 상현의 차선책이었을까?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19~21, 24~25). 일찍이 사도 바울이 오늘날 목회자의 고뇌를 모두 겪고서 말한 성경 말씀이다. 그런 의미에서‘박쥐’라는 우리말 제목보다는‘Thirst’라는 영어 제목이 보여 주듯 세상을 향한 구원의 열정이 있으면서도 육체적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는 한 신부의 모습을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영화에서 말한 육체적인 욕망처럼 눈에 드러나는 것은 극복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른다. 오히려“십자가를 내가 지고 죽기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서약했던 초심은 사라지고 물질이나 명예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시험에 늘 노출되고 쓰러지기도 하는 목회자가 내 안에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모든 시험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사도 바울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오늘도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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