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공동체를 위한 상호존중의 대화(22)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가라지가 있는 것처럼

비가 옵니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비가 옵니다. 비가 오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비난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절대적 진리 중의 하나는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너’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너를 비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너로부터 비난을 당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나를 향한 비난은 늘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도 같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농부는 좋은 씨앗을 뿌렸는데 밭에 가라지가 자라납니다. 그 가라지는 지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비가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산이나  우비, 비를 피할 곳을 준비하면 좋을 것입니다.

비난이라는 선물을 받지 않으면

비난을 당하면 화가 나고 흥분하기 쉽습니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찾아가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비난하는 사람을 찾아가 시시비비를 따지는 일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비난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가 비난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고 나의 대한 비난은 더욱 더 심해질 것입니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리버만(David J Lieberman)은 그의 저서 『당근으로 만든 채찍(Executive Power)』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상대에게 못된 짓을 하고 나서 그 상대를 더 미워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고의든, 사고든 상대에게 피해를 주고 나면 자신의 인지 부조화를 줄이려고 피해를 준 상대를 미워하게 된다. 평소와 일관되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따라서 이 내적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이 일관된 것이었다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필요가 생긴다. “왜 내가 저 사람에게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는 갈등에 대해 “그건 그가 정말 싫고 그는 그렇게 미움 받아 싸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어.”라고 합리화한다. 이 경우 그렇게 합리화하지 않으면 자신이 나빴다는 것이 확실해지게 되므로 곤란하다.’ 비난에 대한 시시비비를 따질 때에 상대방은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고 편집증적이고 비이성적으로 자기 중심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난을 따지기보다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그 비난을 개인적인 것으로 받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교의 잡아함 42권 1152경 『빈기가경(賓耆迦經)』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옵니다. 어느 날 젊은 바라문 빌린기카가 찾아와 참 듣기 거북한 욕설로 붓다를 모욕하였습니다. 붓다는 잠자코 있다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대에게도 어느 좋은 날(吉日) 그대의 집에 친척과 친구 등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게 아니오?” “그렇소. 내 집에도 때때로 친구와 친척이 방문할 때가 있소” “그럴 때 그대는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할 것이 아니오?”“물론 나도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오.”“바라문이여, 만약 그들이 음식대접을 받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소?” “그들이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도로 내 차지가 될 것이오.” 이에 붓다는 그를 타일렀습니다. “바라문이여,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대가 대답한 그대로요. 그대는 아까부터 계속 나를 헐뜯고 비난하는데 나는 그 대접을 받지 않겠소. 그러니 그것은 도로 당신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주인과 손님이 같이 먹고 환담하는 것이 대접일 것이오. 그대가 나를 헐뜯는 대로 내가 그대를 헐뜯거나 그대가 나를 비난하는 대로 내가 그대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내가 대접을 받은 것이 될 것이오. 그러나 나는 지금 보듯이 그 대접을 받지 않겠소. 그러니 바라문이여, 이 대접은 도로 그대의 것이오.” 바라문은 붓다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난을 맞받아치지 말고 그 비난을 받지 않으면 됩니다. 마치 비를 피해 우산을 받쳐 들듯이, 가라지가 알곡과 함께 자라지만 내버려두어야 하듯이...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통하여 나의 성숙을

다윗은 시므이가 비난할 때에 그 비난과 저주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1-12). 어리석은 사람은 사소한 비난에도 흥분하고 화를 내지만, 현명한 사람은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논쟁을 펼치는 사람으로부터 뭔가를 배우려 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영국의 시인인 월트 휘트먼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은 당신을 부드럽게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의 주장에 반대하며 비난하고 배척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이 있어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월트 휘트먼의 이 이야기를 실천한 사람이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는 남의 비난을 통하여 자기성찰을 한 사람입니다. 

 스탠턴(Edwin M. Stanton)은 아브라함 링컨의 정적(政敵)이었습입니다. 그는 링컨에 대해 아주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던 사람입니다. “수염과 털이 많은 고릴라 대통령을 세울 바에야 아프리카에서 한 마리 데려오는 것이 좋지 않은가? 아프리카로 고릴라를 사러 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일리노이 주에 가면 거기에 좋은 고릴라가 한 마리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자기에게 그렇게 심한 비난과 모욕을 퍼부은 스탠턴이었지만, 링컨은 그가 유능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국방장관에 임명했습니다.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이지만 자기감정을 극복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하였고 그를 관직에 임용한 것입니다.

그 후에도 링컨은 그에게 비난과 모욕을 당했습니다. 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에드윈 M. 스탠턴은 링컨에게 ‘바보’라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링컨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소관업무에 간섭하여 화가 났던 것입니다. 그때, 링컨은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어떤 정치가의 부탁을 받고 몇 개의 부대를 이동시킨다는 계획에 서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스탠턴은 그 명령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계획에 서명한 링컨을 ‘바보’라고 모욕했습니다.  그 말이 전해지자 링컨은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스탠턴이 나를 두고 바보라고 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바보일 것이오. 왜냐하면 그의 말은 언제나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그곳에 가서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보아야겠습니다.” 링컨은 즉시 스탠턴을 찾아갔고 스탠턴은 링컨의 명령이 왜 부당한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명령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링컨은 곧바로 명령을 취소했습니다. 이처럼 링컨은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혹독한 비판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그것이 호의적인 동기에서 나온 성실한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링컨이 총에 맞아 쓰러졌을 때, 일찍이 그의 인격에 감복한 스탠턴은 링컨의 조용한 얼굴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여기 누워 있는 이 분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다.”

* 참고문헌 : 박민영, 행복한 중용, 서울:북스토리, 2006, pp.97-98. 데일 카네기, 인생은 행동이다. 손풍삼 편역, 서울:고려원, 1992, pp.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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