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공동체를 위한 상호존중의 대화(26)

예수 그리스도, 판단 멈춤의 전형

이번에는 판단의 멈춤과 예수님의 관계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판단 멈춤의 전형과 같은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존중하고 살리기 위하여 어떻게 판단의 멈춤을 시도하시고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셨는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현상학적인 판단 중지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근거로 판단하고자 했습니다. 그 당시의 율법적 지배와 관습으로는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서는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고 기록합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렇게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대답을 재촉할 정도로 예수님은 오래도록 그렇게 계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 이후에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결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요한복음 8: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바리새파 사람들도,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도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현장, 그 사건의 당사자들로부터 시선을 돌리시고, 잠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아마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학적인 세계로부터 잠시 떠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세상 존재의 자명성에 제동을 거는 장치로서 “현상학적 판단 중지”라고 부를 수 있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일단 판단멈춤에 의하여 유보된 세상은 절대적 진리, 자명한 진리의 세계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토록 자명한 진리의 현실을 눈을 감고 새롭게 보기를 원하는 것이 철학세계에서의 현상학적 판단 중지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판단 중지를 통해 친숙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낯설게 보고, 그토록 자명했던 현실의 모든 것들이 부정되거나 도전받거나 의심스러워지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일단 멈추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새로운 지혜가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일단 멈추고, 즉각적인 판단을 멈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판단하고자 하는 죄의 속성

예수님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에 대해서도 일단 판단멈춤을 선언하시고 더 깊은 진리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복음 8:7). 이 말씀은 우리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나의 죄를 거부하고 덮으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고발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로마 2:1). 이런 사도 바울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에서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죄를 고발하는 검사나 죄를 판단하는 판사와 같은 역할을 감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들은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결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형제자매들을 판단하고자 하는 경향을 인식하며, 판단의 멈춤, 현상학적인 판단 중지를 일단 시도해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고자 할 때에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들의 기준과 잣대로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들려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 두 사람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하나님 앞에 서고 싶어 합니다.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추구합니다. 그들은 모두 감사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습니다(누가 18:14). 여기에서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판단이라는 관점에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그 당시 정치, 경제적으로 사회의 지도계층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전통과 신앙의 계승자였고, 율법을 준수하고 존경받는 모범계층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동족에게서 세금을 징수해 로마정부에 바치는 민족배신자와 같은 존재였으며, 회당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이었고,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객관적인 기준과 판단의 잣대로는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할 사람은 분명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리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세상적인 가치와 판단의 기준이 전복되는 경우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각자의 자기인식과 판단기준의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누가 18:11-12). 그는 자기를 인식할 때 율법을 준수하는 의인이며, 그의 판단의 기준은 그보다 못한 세리였습니다. 그는 내려다봄으로써 자기기만과 자기절대화, 자기공로와 자기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는 남을 판단하고자 하는 죄의 속성인 교만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하나님이 필요 없는 재판관이 되어 세리를 판단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18:13). 그는 자기를 인식할 때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이었습니다. 그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을 올려다 봄으로써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죄인으로 남을 판단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서있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오류, 그것은 자기의 판단 기준으로 남을 업신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Do not judge, and you will not be judged”(누가 6:37).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수 있으며 또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 아닙니까?”(로마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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