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 문장에는 중앙에 국조(國鳥)인 흰머리수리를 중심으로 둘레에 ‘다수에서 하나로(E pluribus unum)’라는 구절이 쓰여 있다. 이는 미국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로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E pluribus unum: One of Many는 ‘다수로부터의 하나’ 혹은 ‘다수에서 하나로’ 라는 의미로 미국이 13개주로부터 출발해 새로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선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는 우리의 영의 눈을 뜨게 하며, 감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죄를 용납지 아니하는 공의의 하
예수님의 활약이 정점에 오를 때 즘하여 유사한 단체들이 난무했던 사실을 성경에서 엿볼 수 있다. 하루는 요한이 예수께 항의라도 하듯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는 어떤 자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했나이다”(막 9:38)라고 했다. 예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며 이스라엘의 총 인기를 한몸에 지닌 예수의 행적에 도취되었던 자들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복음 26장 42절예수께서는 나이 겨우 삼십삼 세에쓰리고 아픈 십자가를 눈 앞에 두시고 동산 한 바윗돌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시며그 잔이 옮겨가기를 간청하셨습니다.모세는 나이 팔십에 막대한 사명을 받았으나늙고 쇠약한 그였기에 자신이 없어“주여, 보낼 만
크게, 그리고 많이 변해 버린 요즘 같은 팬데믹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다윗에게 던져 보았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불확실한 환경과 두려움이 엄습할 때 무엇을 구했을까?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가장 되고 싶은 모습은 무엇이었을까?시편 27편은 내가 자주 묵상하는 다윗의 시이다. 다윗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영원히 살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무적의 복싱 챔피언이라던 마이크 타이슨도 얻어맞고 패할 때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초인적이라 할 만큼 큰 일들을 해낸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뽑아버릴 수 없는 “육
그런데 애초부터 살고 있었던 원주민(인디언)을 보호 구역으로 몰아내고 지배하고 있는 다수의 백인도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계 이민자들의 자손이다. 다만 그들의 조상들이 다른 이민자들보다 먼저 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득권이나 우월감을 내세워 정세와 필요에 따라 소수 민족 이민자들에 대한 정책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경해 왔다. 일찍이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 대륙 동부에 들어온 앵글로색슨족은 원주민(인디언)들을 서쪽으로 밀어내면서 영역을 확장해 갔다. 루이지애나 지역대(地域帶)를 사들임으로써 땅을 곱절로 늘리더니 드디어 루이스
지난 45년 간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던 큰 산과 수많은 암초들이 많았다. 옛말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듯이, 사역이 조금씩 커질수록 앞을 가로막는 각종 장애물들은 점점 늘어만 갔다. 초창기에 비해 의료비 지출이 그렇다. 과거에는 몇 백, 몇 천 불 단위였는데, 이제는 몇 십만 단위가 예사롭지 않게 발생하고, 의료비 지원 대상자도 과거와 비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태복음 6장 9절)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옵소서.천상천하에 유일하신 아버지 하나님,맡기신 사역을 통해 주의 이름 높이게 하옵소서.굶주리고 헐벗은 나라에 임하옵고우리의 마음과 맡기신 사역장에도 임하사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우리의 삶의 공간에서도 이루게 하옵소서.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을 앞세우지 않게
상큼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떠오르는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다가 본능적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무 사이에 서 있는 내 그림자가 마치 나도 거목인 양 멋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울창한 숲을 거닐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훌쩍 커버린 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던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순간을 포착한 내 감각을 칭찬하며 오늘 하루도 저 큰 백향목처럼 멋지게 살아보자고 다짐
앙금은 녹지 않고 가라앉는 것들을 일컫는 말로, 침전물과 유사한 뜻이다. 우리의 삶에서 생기는 앙금은 지난날의 좋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남아 있는 나쁜 감정을 뜻한다.마치 앙금이 물에 녹지 않고 바닥에 남아 있듯이, 안 좋은 감정이 녹아서 흘러가지 않고 삶의 여정에 그대로 남아 무언가를 막고 어려움을 준다. 평상시에는 잘 모르는데, 그것을 골똘히 생각하거나
구원은 쉽게 말해 심령에 참 건강과 기쁨과 평화가 깃든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 심령에 참 기쁨과 참 평화가 없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도 일시적인 슬픔과 불안과 연약함에 시달릴 수 있으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슬픔이나 불안이나 연약함 때문에 흔들리거나 넘어지거나 망하지 않습니다. 구원으로 얻은 심령의 건강과 기쁨과 평화
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춘추전국시대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 왕이 죽자 10년 전 월나라에게 침략 당했던 원한을 갚기 위해 월나라를 침공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월나라 왕 구천의 반격에 실패하고 화살을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합려는 죽기 전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 왕 구천이 나를 죽였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왕이 된 부차는 가시 돋은 섶 위에서 자며 부친의 원수를 다짐했다. 이른바 '와신'이다. 그리고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를 안 월왕 구천은 책사 범려의 만류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가서 네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0)갈릴리의 약속을 하신 주님,금년에도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갈릴리에서 뵙고상하고 지친 심령을 주께 토로하리이다.다 자라지 못한 어린 생명들이포악한 손아귀에 끌려가 짐승처럼 부리고먹고 마실 양식도 주지 않아 피골이 상접된 채맥없
예수님의 부활 사실은 3년씩이나 따르며 대면했던 제자들조차 믿지 못한 사건이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뿐더러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났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도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요 11:12)으로 알았기에,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예수의 죽음을 확인했던 터라 다시 살아나리라는 사실에 대해 믿을 수도 없었고 전혀
기독교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이해 때문에 부활절을 가장 큰 절기로 지켜왔다. 한국의 어지간한 교회들은 성도들이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의미있게 보내도록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담을 수 있는 여러 그릇들을 해마다 준비한다. 어느 교회는 40일 동안, 또 어떤 교회는 고난주간 일주일 동안이라도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의
제가 뒷마당으로 나가면 옹기종기 모여 있던 닭들이 뒤뚱거리며 우르르 달려옵니다. 나 때문이 아니라 먹이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습니다. 굳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일할 때에는 깃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와서 어슬렁거립니다. 손을 내밀면 한참 생각하다가 두 팔사이로 슬금슬금 들어옵니다. 품에 안고 몸을 쓰다듬으면 “사람 품에 안긴 어
어느 날 아침 두 남자가 바닷가에서 조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달리던 그들은 모래에 반쯤 파묻힌 이상한 등잔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한 남자가 그 등잔을 집어 들고 등잔에 묻은 모래를 손으로 닦았습니다. 그러자 등잔 심지 구멍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니 엄청나게 큰 거인이 되었습니다. 그 등잔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알라딘의 마술 램프였던
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1620년 종교적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이주한 지 10년 후 또다시 1000 여명의 청교도를 태우고 신대륙으로 향한 '아벨라' 호에는 이들의 지도자 목사 존 윈스럽이 있었다. 그는 갑판에서 '저 건너 새로운 언덕 위에 세상이 우러러보는 빛나는 도시'를 세우자고 설교했다. 그가 말한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번영이 넘치는 크리스천의 이상국가에 대한 청사진이었다. 이는 종교나 인종에 상관 없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꿈꾸고 모여드는 누구나에게 열려
팬데믹 때문에 미국에서 애완견을 기르는 가정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통계까지는 모르겠고 아침 저녁으로 개 데리고 산책하는 주민들이 부쩍 많아졌음을 느낍니다. 개 공원에는 하루종일 사람과 개가 들락날락합니다. 비교적 대형견을 기르는 견주들이 옵니다. 소형견들은 뒷마당이나 동네 산책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니까요. 그곳에서는 온갖 종류의 개들을 볼 수 있습니다.